오늘은 제가 무척 좋아하는 인도우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날씨가 따듯한 날 여우가 햇볕을 쬐고 있습니다. 졸음이 와서 고개를 까딱까딱하고 있는데, 마당 한가운데를 지네가 지나갑니다. 지네는 종류에 따라 다리가 30개에서 340개에 이른다고 하는데, 백족(百足)이라고 불리듯이 보통은 다리가 100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많은 다리를 움직여서 지네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여우는 갑자기 많은 다리가 어떻게 엉키지도 않고 잘 가는지 궁금해집니다. 여우는 지식인으로 비유되는 똑똑한 동물이지요. 여우가 지네에게 묻습니다.
“지네야, 내가 하나 물어볼게 있다.”
“아는 것 많은 선생님께서 저한테 물을게 무엇이 있습니까?”
“그렇지. 네가 알다시피 내가 아는 것도 많고 겪어온 것도 많다만, 네가 그 많은 다리로 엉키지 않고 걷는 것만은 내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너는 그것을 생각해 봤느냐?”
“아니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걷고 살았습니다.”
“에이, 멍청한 놈아. 너한테 달린 다리가 어떻게 걷는지도 생각해 보지 않다니…. 지금부터라도 고민해 보거라.”
가장 똑똑하다고 여겨지는 여우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어서, 이때부터 지네가 고민을 합니다.
100개의 다리….
법우님도 고민해 보시지요. 두 개의 다리도 고민하다 보면 엉킵니다. 그냥 두면 잘 걷는데, 그것을 분석의 대상으로 하는 순간 엉켜버립니다. 자기 다리가 어떻게 움직이면서 걷는지 생각하던 지네도 한걸음 나아가지 못한 채 엉켜버렸습니다. 그때 여우가 다시 묻습니다.
“왜 그러고 있느냐?”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생각하다 보니까 다리가 엉켰는데요.”
“거봐라. 너는 제대로 못 걷게 되어있느니라. 본래 걷지 못하는 것이 감히 걸었다니…….”
이것이 여우의 진단입니다.
전 이 우화를 참 좋아합니다. 그냥 살면 되는데, 그 알량한 지식과 경험사례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대상화하고 단정해 버립니다.
이처럼 ‘나’라는 자가 개입하면서 고정화시키면 꼼짝 못합니다. 어떤 것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고정화 한 것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자리를 뱅뱅 맴돕니다. 이것을 뭐라고 합니까?
이것이 바로 윤회(輪廻)입니다.
죽어서 하는 윤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가 설정한 테두리 안에서 계속 못난 짓을 하는 것이 윤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윤회하다보면 반드시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괴로움이라는 현상입니다. 윤회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괴로움입니다.
괴롭다? 언제까지 이래야 돼?
그런데 따지고 보면 아무도 그 사람한테 언제까지 뱅뱅 돌라고 시킨 적이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반복할 뿐입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정체입니다. 즉, 자기가 받아들인 상상력의 결과로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인데 거기에 자기 스스로 매입니다. 자기와 남을 비교하는 가운데 우쭐해지기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하면서 그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교하는 순간, 그 생명은 이미 생명이 아닙니다. 어떤 것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고정된 시점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명은 고정된 시점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생명이란 무한한 가능성으로 끝없이 활동하며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나와 남을 비교하면서 윤회를 거듭하고 있는 것은, 생명을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를 물질로 여기면서 가능성을 닫고 고정된 현상만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나야.’ ‘나는 정성을 다했어.’ ‘나는 최선을 다했어.’ ‘이런 것이 여자의 세계야.’ ‘50대는 이렇게 사는 게 맞아.’
생명이란 고정할 수 없이 변하는 것인데도, 이런 식으로 마침표를 찍어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죽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정된 현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쉽게 고정화하며 단정합니다.
‘너는 수학에 재질 없어.’ ‘너는 노래 못해.’ ‘너 같은 놈이 뭘 하겠어?’
가까운 사이일수록 편견이 심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 동창 간, 친척들…….
과거에 익숙한 관계 속에서 새로운 만남이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까운 가족들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이야기할 게 없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새롭게 인정해주지 않고 과거의 잣대로 평가하려하기 때문이지요. 지금의 나를 보지 못하고 아직도 애들로 취급하거나, 과거에 성적이 좋지 못한 사람이라는 고정된 시각으로 보니까 다가갈 수 없습니다.
즉, 살아있는 생명을 고정된 시각으로 평가하려 하니까 교류가 일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죽음으로 대하는 사람과 어떻게 교류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런데도 감히 생명을 단정하겠다고 합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의 가능성에도 마침표를 찍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살생입니다. 이처럼 마침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마침표를 찍을 때, 부처님께서 참으로 조심스럽게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를 ‘죄(罪)’라고 합니다. 자신에 대한 살생으로 끝나지 않고 만나는 인연들까지 살생하니 그 죄가 얼마나 중하겠습니까? 그 죄를 누가 감당해 주겠습니까?
그러나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 어둠에 갇히지 않은 것이 생명의 자리입니다.
스스로 자기생명에 마주하는 것이 바로 무아법(無我法)입니다.
“나라고 주장하는바 실체가 없다.”
언제나 한 자리에 머무는 한, 자기의 삶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유치원 다니던 아이가 초등학교에 진학하면 그 아이는 유치원생이 아닙니다. 또 초등학교를 다니던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 그 아이는 더 이상 초등학생이 아닙니다.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유치원생으로 불렸던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고, 초등학생이었던 아이가 중학생이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즉,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으로서의 아이는 전면 부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마주해야 합니다...................................................................................<계속>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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