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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승常勝의 용사, 보살이여!

문사수 2013.11.19 조회 수 24721 추천 수 0

 흔히 절에 가면 여자신도를 부를 때, 000보살이라는 접미사가 꼭 따라 붙습니다. 그냥 본인의 이름을 부르거나 누구 엄마라고 해도 될 텐데, 굳이 보살이라고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하며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따라서 먼저 밝혀 두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불교집안에서는 여자신도 만을 가리켜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참된 자기의 생명가치를 발휘하고 있을 때를 일러, 보살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보살은 남성이나 여성 또는 중성과 같은 생물학적이 테두리를 갖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분류로부터 벗어난 특수한 존재란 말이 아닙니다. 어떤 모습으로 출현하든 자기의 생명가치를 완전히 드러내고 있으면, 그대로가 보살인 것입니다.
 실제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한 가지의 모습만을 갖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 어떤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자식에게 엄마노릇을 하다가도, 친정에 가서는 딸 노릇을 부지런히 합니다. 그리고 시어머니를 뵈면 며느리로 행세하며, 남편과 있을 때는 아내가 됩니다.
 또 한 남자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회사에 나가면 과장의 지위를 갖습니다. 그러다가 지하철을 타고 퇴근할 때는 승객으로 불립니다. 정다운 옛 친구를 만나서는 친구로서의 우정을 만끽합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는 애인이 되기를 자청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각자는 때와 곳에 따라 사람 구실을 달리합니다. 만일 한 가지 모습으로만 살아간다면, 감히 말하건데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다양한 표현을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지요.

 보살(菩薩)이란, 보디삿트바(Bodhisattva)라는 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즉 이 말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소리나는 대로 쓰다보니 보살이라고 굳어진 것이지요.
 보디삿트바는 ‘진실생명을 찾는 구도자’ 또는 ‘참생명을 구현함에 뜻을 둔 생명’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그래서 보살은 모든 삶의 현상들에 집착하지 않기에, 일체의 것을 배우고 이해함에 있어서 잠시의 쉼도 용납치 않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때문에 참되게 산다는 것을 미리 설정하고 그것에 도달하려는 작위적인 태도는 보살의 것이 아닙니다.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연각의 애매함이나 교조주의적인 성문의 경직성 모두에 연연치 않습니다. 성문과 연각을 스스로 토한 실로 자신을 묶는 누에와 같다고 한다면, 보살은 자신이 토한 실위를 자유자재로 노니는 거미와 같습니다.

 그래서 나와 너라는 구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없는 악한 사람도 자기 자식을 아끼는 마음은 갖기 마련입니다. 비록 자기 자식이라는 아직은 폭이 좁은 마음이지만, 어쨌든 자신의 육체를 뛰어넘는 것은 사실 아닌가요? 따라서 이런 마음이 있는 한 이기심의 극복은 약속됩니다. 이기심을 뽑아내는 최선의 방법은 이타(利他)의 행위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런 이타의 싹을 키워 가고 있는 과정이 보살의 삶입니다.
 남이 원래 없기에, 세상사 모두가 나의 일이 됩니다. 다른 사람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자아(自我)가 자신에게 없듯이, 세상의 모든 것에도 실체가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획일적인 한 가지의 모습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가정에 있으나 직장생활을 하거나 어떤 자리에 있어도 삶의 주인공이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때로는 스승이 됩니다. 때로는 제자가 됩니다. 이렇게 삶의 궁극성은 완성되는 것이지요.
 언제까지라는 한정도 없습니다. 이른바 완성이란 마침표를 이르는 것이 아니고, 삶의 과정 자체가 완성의 내용임을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보살이 사는 시간을 굳이 문법적으로 설명한다면 현재진행형이 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생(前生)을 담아 놓은 본생담(本生譚, Jataka)을 보면,
 여기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삶의 흔적들이 남아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어떨 때는 남자로, 어떨 때는 여자의 몸을 받습니다. 신분도 가지가가지입니다. 왕자의 모습으로 살기도 하고, 이름 없는 촌부의 처지가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원숭이들의 왕이 되기도 하고, 사슴들의 왕이 되기도 합니다.
 아무튼 언제 어떤 곳에서나 자신의 면목을 드러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스스로 한없는 인연 속에 들어가 인연 자체가 됩니다. 운명을 탓하며 되지 않을 넋두리나 내뱉고 있을 겨를이 없습니다. 참으로 열심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정직합니다.
 생명의 창조력인 인연을 몸소 갈무리하는 삶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계신 것이 부처님의 전생이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전생에 부처님이 살아오신 삶을 보살이라고 찬탄하는 것이지요.

 전생이란 무엇인가요?
지난 삶의 생생한 현실을 가리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생(來生)의 전생이 되는 오늘의 삶을 사는 우리야말로 보살일 따름입니다.
 결국 불교에서 보살을 강조하는 이유는 실로 간단합니다. 우리의 삶을 한가롭게 이야기하고 있을 만큼 여유가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보살의 삶을 특정한 사람이 택하는 삶의 방식으로 치부한다면, 그야말로 아직도 삶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 차 한 잔이 있습니다.
 그런데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그 맛에 대하여 묻습니다. 설명해야 하는 나는 지금과 같이 갖가지 용어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할 것입니다. 담백하다든가, 씁쓰름하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한참 침을 튀기며 아무리 열변을 토해도 끝내 상대는 알아듣지 못하고 맙니다. 차맛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는 데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언어의 벽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찌 차뿐이겠습니까? 미세한 감각으로부터 궁극적인 삶의 지향에 이르기 까지 온갖 것들은 우리 각자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차맛을 알려는 사람은 자신이 직접 마셔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 전반의 문제이지, 특별한 사람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지요.

 카필라의 왕자로 태어나 쿠시나가라에서 몸을 버리실 때까지의 부처님.
 우리는 부처님의 전 생애를 통해서, 논리나 사변의 우롱 일체를 불식한 적극적인 삶의 실현을 봅니다. 형이상학적인 진리를 몽땅 배제하였기에 삶의 현장을 절대 긍정합니다. 결코 도피적인 비겁성이나 말장난의 흔적은 눈꼽만치도 찾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과 마주하였기에, 마침내 삶의 승리자(勝利者)가 된 용사(勇士)의 위용만이 다가 올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현장이란 번뇌(煩惱)와 싸우는 전쟁터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 싸움에서 항상 승리하는 용사를, 그 모습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무한한 삶의 가능성인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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