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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예불문3] 신앙생활을 열어가는 첫 관문, 공양(供養)

문사수 2014.01.13 조회 수 28352 추천 수 0

정토예불문 강의(3)

신앙생활을 열어가는 첫 관문, 공양(供養)

 

 

그럼 이제 예불문의 본문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금지차일주향 변성무진향운계 봉헌극락제성전

 

我今持此一炷香 變成無盡香雲界 奉獻極樂諸聖前

 

이 부분이 정토예불문의 첫 대목입니다. 예불을 모실 때 이 부분은 대중들이 다 함께 하지 않고 인례(引例)를 집전(執典)하는 분이 혼자서 모시는 부분입니다. 예불을 시작한다는 사실을 부처님과 대중들에게 고하는 부분이지요. 쉽게 말해서 개회선언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에 불교 신앙의 기본적인 토대가 표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불교경전은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나는 이렇게 들었다 로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신앙은 ‘공양(供養)’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금지차일주향’, 직역하면 ‘제가 지금 한 줄기 향을 가지고서...’ 정도로 해석이 되겠습니다. 향을 세는 단위는 보통 기둥 주(柱)를 써서 한 자루 두 자루 합니다만 여기에서 보면 나무목(木) 변 대신에 불화(火) 자가 붙었습니다. 향에다 불을 붙여 사룬다는 뜻임을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향공양을 올릴 때 불을 안 붙이고 올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향(香) 공양의 의미는 참으로 깊습니다. 불단에 올리는 가장 기본적인 공양물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초[등:燈], 향(香), 차[다:茶]가 그것입니다. 초는 ‘세상을 밝힌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향은 ‘세상을 맑힌다’는 의미입니다. 향을 피워서 그 향기가 주변을 깨끗이 하고 오염된 것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초와 향은 스스로를 태움으로써 주변을 밝히고 맑힌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상징성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공양이 공양다울 수 있는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로다(甘露茶)라고도 하는데 생명수를 의미합니다. 생명은 물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목마른 자에게 물 한 모금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물은 ‘씻긴다’는 의미가 있지요. 병든 몸과 마음을 말끔히 씻겨서 치유합니다. 물도 자신이 오염될지라도 만물을 정화시킵니다.
 

 

위 세 가지 공양물은 ‘밝히고’, ‘맑히고’, ‘씻기는’ 것으로서 그 능력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신을 태우거나 던져서 세상을 정화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안위와 이양(利養)을 위해서 사는 중생들의 간교한 마음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양을 올린다는 것은 바로 그 정신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변성무진향운계, 직역하자면 ‘다함없는 향의 구름세계로 변화를 이루어서...’라는 뜻입니다.

구름은 그 자체로 공기가 습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상태입니다. 구름 속에 있으면 만물이 촉촉하게 젖어들듯이 한 줄기 향이 구름처럼 피어올라서 온 세상을 향기로 맑혀간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묘하고 경이롭습니다. 여기서 참다운 공양은 물질적인 차원을 넘어서 무한 차원에로의 변화를 이루어내는 초월적인 종교행위임을 알게 됩니다. 그 초월적 변화를 이루어내는 원리는 스스로를 던진다는 것입니다.


 

불교를 신앙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무너뜨려 가는 과정입니다. ‘나’를 앞세우면 거기서부터 고통이 시작됩니다. 조화도 깨집니다. 그래서 불교의 중요한 수행덕목인 보시나 인욕이나 정진 등은 ‘나’에 대한 집착을 뿌리 뽑는 과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본래 있는 나를 억지로 뿌리 뽑는 것이 아니라 ‘나는 본래 없다’를 깨치는 것입니다. 본래 있던 뿌리를 뽑으면, 뽑힌 뿌리도 있고 뽑던 손도 더럽고, 주변도 파헤쳐서 지저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뿌리가 없던 것이기에 원래부터 밝고 맑고 깨끗한 상태가 드러난 것일 뿐입니다.

 

향을 피워 들고서 불단에 공양을 올릴 때 우리 스스로도 향이 되어야 합니다. 향과 같이 스스로를 태울 준비가 되었으니 ‘나’라는 잣대가 사라집니다. 자연히 온 우주법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향공양을 올리는 것이기에 이 공양을 받을 만한 분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봉헌극락제성전입니다. 극락에 있는 모든 성인들께 받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공양하는 마음에 상응한 결과인 것입니다. 즉 맑은 마음에 자연히 비추어져서 성인이 우리 앞에 모습을 나투는 것입니다.

여기서 극락(極樂) 세계에 대한 자리매김이 중요합니다만 다음 시간에 상세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원수애납수 원수애납수 원수자비애납수

願垂哀納受 願垂哀納受 願垂慈悲哀納受
 

바로 이어서 공양을 받아주시기를 간절하게 원하는 마음을 오체투지와 더불어 표현하게 됩니다. 원수애납수, 즉 ‘원컨대 드리우셔서 애달피 여겨 받아주소서.’라는 뜻입니다. 뭘 드리우는가 하면, 세 번째 문장에 나와 있듯이 ‘원수자비애납수’입니다. 즉 ‘자비를 드리워서 저의 조촐한 공양을 기꺼이 받아주십시오.’라는 말씀입니다. 간청의 원을 세 번 반복하므로 그 정성의 진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불교는 세 번 청하면 어떤 것도 다 받아들인다고 할 정도로 넓은 포용의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이 삼청(三請)의 유래는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시고 난 후, 그 깨달음의 내용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시기를 기다리고 계실 때, 천신(天神) 중의 가장 우두머리인 범천(梵天)이 알고 와서, 부처님께 설법해 주실 것을 머리 조아리며 세 번 요청한 데서 기인합니다.

 

부처님의 깨치신 법이 아무리 깊고 미묘하더라도 그것을 듣지 못하고, 또 듣는다 하더라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법문을 듣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고정관념일 것입니다. 특히 여태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법문을 받아들일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범천은 우리들 관념의 극상을 상징합니다. 범천이 무릎 꿇지 않고서는 어떤 법문도 먹혀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범천의 삼청은 우리들 고정관념이 무너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계속>


<문사수법회 정신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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