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南無
 
나무南無, 불이不二의 세계로 들어간다
부처님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세요!
부처님은 생사를 해탈하셨고, 대립을 뛰어나신 분입니다.
그러나 중생이 생사에 헤매고 괴로움에 신음하는 상태로
내버려두는 분을 부처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중생을 제도해서, 생사와 괴로움에서 건져주시기 때문에
부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부처님의 참이름이 아미타가 됩니다.
아미타[阿彌陀:無量壽·無量光의 두 가지 뜻을 동시에 의미함]란, 나의 참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간적으로 무한생명(無限生命)이고, 공간적으로 무한광명(無限光明)인 참생명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참생명의 세계와 만나려면,
나무[南無:본래의 참생명 자리에 돌아간다는 뜻으로 귀명(歸命)·귀의(歸依)라고도 한다]」 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南無阿彌陀)」가 될 때, 우리의 참생명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무(南無)」란, 『인과응보 속에 살고 있는 이 가짜생명을 버리고, 진실생명인 부처님생명으로 돌아가겠습니다』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돌아가려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겠습니다 하는 것 역시 나무입니다.
중생 쪽에서는 「중생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나무」입니다.
부처님 쪽에서는 「제발 부처가 되어다오」하는 것이 「나무」입니다.
중생 입장에서는 중생을 부정하는 소리, 부처님 입장에서 보면 부처가 되어달라고 간절히 요망하시는 소리가 「나무」입니다.

언뜻 중생이 먼저 부처님을 부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을 부른다」는 것은, 부처님이 「제발 부처가 되어 다오」하고 간청을 하시니까,
「내가 중생이 아닌가 보다」하고 생각이 드는 것이지,
중생인 내가 처음부터 「나는 중생이 아니다」라고 선언할 능력은 본래부터 없습니다.
이와 같이 염불(念佛)은 나무하고 계시는 부처님이 나를 불러주시는 소리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중생 보살피시기를, 마치 효성스러운 자제가 부모님 모시듯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중생인 우리가 부처님을 자비로운 아버지로 모신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방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부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당신은 그렇게 힘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바라건데, 부디 부처로 살아 주십시오.』
이렇게 외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南無)!」할 때, 중생생명(衆生生命)의 원리인 인과응보의 세계가 부정됩니다.
물론 인과응보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상대유한의 세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참생명인 절대무한의 세계에는 인과응보가 없습니다.
이렇게 나무하여 아미타가 완전히 실현된 상태를 「불(佛)」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께 매달리면 복을 받는다. 부처님한테 가서 빌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아직 중생이 부처님을 찾아가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염불을 깊이 있게 하면, 「내가 부처님을 찾기 전에, 부처님께서 이미 나를 찾고 계시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부처님을 찾아간다는 것이나, 부처님 쪽에서 나를 찾아온다는 것이나
아직은 나와 부처님이 따로라고 생각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하면,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부처님을 찾고 부처님이 나를 부르니,
결국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세계, 즉 생사(生死)가 없는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불이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은 본래부터 나는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부처님과 나는 본래부터 한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다시말해서 불이(不二)의 세계가 바로 극락(極樂)세계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왕생(往生)이라는 말도
공간적으로 이동을 해서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이 아니라 불이(不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