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름과 응답
 
염불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무한을 가늠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애쓸 필요가 없기에 무한입니다.
염불이란, 스스로 자신의 참생명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 있는 부처님의 무한한 공덕이 자신의 미망 때문에 가려져 있다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순간
모든 미혹이 다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생극락(往生極樂)입니다.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며, 성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문을 듣고, 듣고서는 자기의 일상생활에 비추어보고,
참된 방향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수정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불자들의 생활 속에서 나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부처님의 세계가 저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하는 힘이 바로 염불입니다.
때문에 염불은 주문이 아닙니다. 염불은 부처님의 법문입니다. 그러므로 염불하는 것을 ‘듣는 것’이기고도 합니다.
법회에 나와서 법문을 듣는 것만이 아닙니다. 경전을 읽는 것도 읽으면서 듣는 것입니다.
또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도 듣는 것입니다.
『너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이야』 하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것입니다.
『너에게 있는 장벽은 모두 해결되는 것이야. 걱정하지 말아. 너에게 원수가 나타나더라도 문제될 것 없어.
모두가 네 마음의 그림자가 그렇게 나타난 것뿐이고, 전생에 지은 업연으로 나타났더라도,
그런 모든 것들도 너의 염불 속에서 소멸될 수 있는 것이야』라는 법문을 주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바로 불난 집이다. 그 불난 집 안에서 아무리 잘살아 보았자 소용이 없으니,
어서 불난 집 밖으로 나오도록 하라』

고 하시면서,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하신 이유는 단 한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성불시키려는 이유뿐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우리를 성불시키기 위해 불난 집에 있는 우리들에게 밖으로 뛰쳐 나오라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 부르심에 우리는 『네!』하고 응답하고서, 그 길을 따라 나오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네!」 하고 응답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하는 염불(念佛)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자신이 불난 집에 있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부처님과 우리들의 참이름인 「아미타불」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나무아미타불!』하고 부르시는 소리에,
우리가 『나무아미타불!』로 응답하는 것이 염불의 세계입니다.

그렇기에 염불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염불은 부처님 쪽에서 나를 불러주시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부름에 응답하면서 바로 불난 집에서 뛰쳐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염불하는 순간, 우리 삶의 차원은 향상합니다.
결과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현세이익(現世利益)이 보장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세이익을 단순한 소원성취로 알면 잘못입니다.
예를 들어 당뇨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설탕을 주는 것이 자비인가요?
설탕 달라고 조르는 사람에게는 설탕을 바라는 마음을 없애주는 것이 자비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보잘것 없는 소원을 성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참다운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좀 더 큰 소원을 갖게 됩니다. 차원이 높은 원(願)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장애로 나타난 원수 같은 사람이나 사건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으로 해서 나의 차원이 더욱 높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현세이익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염불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상관없습니다.
왜일까요?
이 세상 자체가 이미 무한한 부처님의 원력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