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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호지간(一呼之間)에 산다

문사수 2014.04.07 조회 수 23441 추천 수 0

 어느 날 부처님은 제자 셋을 불러다가 점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 제자에게 묻습니다. “너는 너의 목숨이 언제 사이에 있다고 보느냐?”
 그러자 첫 번째 제자가 대답합니다. “스승님이시여, 인간의 목숨은 하루 중의 낮과 밤사이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신 부처님께서, “너는 아직 도(道)를 모르는구나.”하십니다.
 이어서 두 번째 제자가 들어오니, 똑같이 묻습니다. “너는 너의 목숨이 언제 사이에 있다고 보느냐?”
 이에 제자가 “제가 생각하건대 목숨자리는 음식을 먹다가 숟가락을 놓으면 죽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숟갈 들고 밥 먹는 사이에 제 목숨이 달려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이 말씀을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너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하십니다.
 세 번째 입실한 제자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는 너의 목숨이 언제 사이에 있다고 보느냐?”
 그러자 제자가 대답합니다. “제가 생각하건대 일호지간(一呼之間) 즉 내쉬고 들이쉬는 그 사이에 목숨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비로소, “옳다. 옳다. 너야말로 도를 아는구나.”하면서 찬탄하십니다.

 어찌 안 그렇겠습니까? 사실 날이면 날마다 나의 목숨이 그렇게 연장되면서 계속 활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구체적인 증거라고 한다면, 오직 이것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법우는 분명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나 해서 묻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호흡에 집중하면서, “내가 숨 쉬고 있는 게 맞나?”하며 확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와 같이 자연스레 그리고 태연히 살고 있을 따름입니다. 호흡이라고 하는 활동의 결과, 몸의 상태로 드러나거나 작업하는 모습으로 펼쳐지거나 혹은 다양한 사회적인 역할로 자리매김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당연하다는 것은 자칫 착각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항상 하리라는 믿음을 의심치 않기에, 당연한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무엇이 참으로 항상 한 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의 온갖 사건이나 사람들을 기웃거리기에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현재 54살인 어느 외국인은 자기를 35살로 정지시켜 놓으려고 얼굴을 27번을 수술했는데, 앞으로 70살이 될 때까지 계속 하겠답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형(成形)미인대회라는 행사가 상당히 크게 열리는데, 출연자들은 떳떳하게 어디서 고쳤다는 것을 밝힌다고 합니다. 그리고 순위를 발표할 때는 어느 박사가 성형한 누구라고 덧붙인답니다. 성형을 잘해 주리라는 기대를 품은 많은 잠재고객들이 그 의사에게 줄을 서게 될 테니, 왜 안 그렇겠습니까? 

 성형을 통해서라도 만족을 추구하는 이유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행복해지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참으로 행복한가? 하면, 타는 목마름처럼 행복을 향한 끝없는 시도만 있을 뿐입니다. 예뻐지겠다고 성형을 하자마자 곧 바로 남의 얼굴과 비교합니다. 그러니 끝없이 비참해지기를 작정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총총걸음으로 길을 바삐 걷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질 않습니다. 고개를 들어 저기가 좋은가 하고 눈이 팔렸다가는, 코끝을 간질이는 구수한 냄새에 침이 절로 넘어가고, 스치며 지나는 행인의 부드러운 옷깃이 남긴 감촉에 취하기도 합니다.
 그 와중에 하늘이 무너질까 땅이 꺼질까 온갖 걱정으로 지새면서도 지칠 줄을 모릅니다. 경제지표를 나타내는 그래프가 오르락내리락하는데 따라서 가슴이 부풀다가는 순식간에 쪼그라듭니다. 그런가하면 제 잘난 맛에 아래위든 좌우든 가리지 않고 거침없는 언사와 행실로 종횡무진입니다.
 오직 끝없는 걱정과 암울한 근심 그리고 이글거리는 분노로 뭉친 자기를 내세우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간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앞세우는 한 만남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측정에 따르는 평가의 기준을 놓지 않는 한, 삶은 피곤에 찌들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피곤합니다.
 피곤의 다음 순서는 세상만사가 다 귀찮아진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평가하기에 피곤하다 보니, 다 싫어집니다. 가족도 싫고, 친구도 싫고, 일도 싫고, 공부도 싫고, 오락도 싫고, 뭣도 다 싫어집니다. 

 바쁘다는 것은 이처럼 켜켜로 쌓인 속내만큼이나 복잡합니다. 그만큼 삶을 소비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추구하는바 자기만족의 잣대를 휘두르기에 바쁩니다. 언제까지나 일호지간의 순간을 보장받으리라는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의 근원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면 그건 한낮 관념(觀念)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데 말입니다.
 항상 ‘~하리라’는 착각의 결과는, 바쁨이 의도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걱정과 근심 그리고 분노의 대상인 세상의 일들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그리도 바쁘게 살았는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반면에 항상 할 줄 알았던 젊음이나 재력 또는 벼슬이 뜬구름마냥 흩어지고 맙니다(다 내 것인 줄 알았는데, 이건 뭐야!).
착각은 착각이지, 참으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또는 시절마다 경우가 다른 것 같지만, 동일한 법칙에서 한 치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른바 ‘모든 현상은 변한다[諸行無常]’는 법칙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일시적으로나마 위안을 주던 많은 조건들이 변화의 흐름에 따라 사라져가지만, 인생 자체까지 무상(無常)한 것은 아닙니다. 인생은 살아가야할 분명한 가치가 있기에 절박합니다. 어찌 감히 무상이라는 말을 하겠습니까?

 인생에는 노소(老小)의 구별이 없습니다. 남녀가 따로 없습니다.
오직 일호지간(一呼之間)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일호지간에 무슨 나이가 있고 남녀가 있겠습니까? 어떤 상대적인 잣대도 끼어들 새가 없습니다. 더구나 건강상태니 빈부격차니 하는 현상을 가지고 웃고 울 틈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직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일호지간에 있을 따름이니,
다만 완전한 부처님생명으로 살밖에.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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