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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선택하는 것

문사수 2013.09.16 조회 수 27200 추천 수 0

 생명(生命)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그 도도한 흐름을 멈추지 않습니다. 다만 가끔씩 단절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지금 이 자리를 떠난 잉여의 생명에너지를 따질 새가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나간 세월 떠올리며 안타까움에 젖어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때 그런 말을 하지 말 것을...”
 “내가 십 년만 젊다면...” 하는 식의 꼬리말을 달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미련을 담고 있는 당사자는 지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당사자입니다.
 그런가하면 막연한 미래를 기약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보자는 위인치고 별 볼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생에는 다음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다 자신에게 솔직해야 합니다.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언제 단 한번이라도 예상한대로 살아보신 때가 있었습니까? 나이가 서른이든 일흔이든 상관없습니다. 아마 자신이 설계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삶이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하다못해 슈퍼에 쇼핑가서도 ‘이것을 집어야지’ 하다가도 엉뚱한 물건을 사들고 나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의 삶이란, 생명이 드러나고 있는 과정을 끊임없이 선택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내 생명의 진정한 요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대단한 노력과 시간을 투여한다고 하더라도 무의미(無意味)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미 있는 삶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그것을 남이 대신해줄 수도 없습니다. 나로부터 말미암아 시작해서 끝내는 나로 모아지는 생명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에 걸맞는 결과가 따라오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내가 쓰지 않는 생명에너지는 더럽고 추한 쓰레기와 같이 버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가장 절박한 문제는, 나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삶의 방식(方式)을 점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급한 마음만으로 만사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날이 밝았구나’ 하면서 바쁘게 살다보니, 어느새 그 오늘은 벌써 어제로 밀려가버립니다. 이렇게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 어떤 것이든 또 다른 새로움에 자리를 내주기 마련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진정한 세계의 지배자는 변화 그 자체일 것입니다. 흔히 무상(無常)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변화 앞에서 무사할 어떤 영웅도, 어떤 건물도, 어떤 유행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산다는 것이야말로 변화를 껴안고 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빠르게 살아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자신이 택한 삶의 현실을 느긋하게 응시하며, 궁극적인 의미를 음미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없는 시간과 공간을 남에게서 억지로 뺏어오자는 게 아닙니다. 본래부터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다음으로 지적할 것은, 너도나도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몸뚱이 좀 편하고 남에게 대접받는데서 찾으려는 망상입니다. 만약에 나는 손끝도 까딱 하지 않고 있어도, 옷을 입혀주고 목욕까지 시켜준다면, 서로 먼저 줄을 설 사람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몸뚱이가 대접받는다는 것을 생각해내기가 쉽지 않겠지요.
 그런 분들에게는 뭣한 얘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염(殮)하는 과정을 관찰해보라는 권고를 하고 싶습니다. 영안실에 대기하고 있는 시신은 가만히 누워있는데, 닦아주고 수의(壽衣)도 입혀주는 광경을 말입니다.
 사실 몸뚱이가 대접받으려고 한다면, 이보다 더한 대접을 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이라는 현상이 나타났을 때만 벌어집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그러고 싶다면, 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자처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법우님들은 죽은 자(者)가 아닙니다. 버젓이 살아 움직이며 삶의 표현을 멈추지 않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산 자(者)로서 우리들이 벌이고 있는 온갖 생명현상에는 잠시의 멈춤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오늘만 그런 게 아닙니다. 순간마다 일어나는 신진대사(新陳代謝)를 통해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몸뚱이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앞생각과 뒷생각이 교차하며 연출하는 관념의 향연이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비롯해서 더불어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규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나 자식, 동창이나 직장의 동료 등 나와 인연 짓는 어떤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좁은 지식이나 얕은 경험에 근거해서 상대를 조건화(條件化)한다는 것은, 나와 당사자 모두를 죽음으로 대하려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또한 앞으로의 삶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나 직위와 같은 부족한 조건이 나아지면 형편이 피겠지’가 아닙니다. 최상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서 최상의 행복이 저절로 따라오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신뢰하는 만큼 조건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福)에 치었다’든가 ‘복에 겹다’는 말에 담긴 속내와 같이,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조건의 충족이 도리어 해(害)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나름대로 한다고 했는데도 생각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면, 그것은 후회와 원망의 계기가 아닙니다. 아쉬움은 분명히 남겠지만,
 “아마 나와는 인연이 없는가 보구나”하고 내버려두면 그만입니다. 못난 자신을 합리화하라는 게 아닙니다. 생명의 무한한 능력이 다른 좋은 기회를 맞으려 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나의 삶은 본래부터 조건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다가오는 어떤 조건도 최상의 조건으로 작용합니다. 

 사실 신원명세서에 불교신자라고 적는다고 해서 모두가 불자(佛子)는 아닙니다. 내 생명 내용이 부처님생명으로 살고 있다는 믿음과, 그것을 몸과 말과 뜻으로 실현하겠다는 결단(決斷)이 없다면 아직은 참된 불자가 아닙니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내 생명이 무한히 살려지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감사와 만나고 있는 생명에 대한 찬탄으로 표현됩니다. 저쪽이 악역(惡役)을 하고 있든 선역(善役)을 하고 있든, 나의 생명이 선택한 현실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살려주기 위해서 나타난 부처님생명의 힘이라는 걸 믿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런 사람이 복을 받게 됩니다. 복 받자고 사는 것은 거짓된 삶입니다.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벌어지는 당연한 결과를, 복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겠습니다.
 우리는 남이나 물질과 비교하며, 구걸하고 살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본래부터 운명이라는 나의 현실을 선택한 생명 그 자체일 따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법회를 모시고 있는 이 자리가 복 받는 자리임을 새겨보아야 합니다.
 “내가 복을 받지 못했구나가”가 아닙니다.
 앉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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