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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예불문 15] 강강수월래 나무아미타불

문사수 2016.02.22 조회 수 12251 추천 수 0

정토예불문(15)

강강수월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정토예불문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회향 게송 첫 부분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여지껏 우리 나름으로 정성스럽게 올렸다는 지심귀명례를 삼보님께서 대자대비로 다시 한 번 받아 주시길 재청(再請)하는 부분입니다.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쏟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개인적인 이해와 조건에 한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뭔가 부족하고 모자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의례적인 듯하지만, 삼보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즉 무한히 크고 넓은 자비심(慈悲心)에 대한 무조건적인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유원무진삼보 대자대비 수아정례 명훈가피력

唯願無盡三寶 大慈大悲 受我頂禮 冥燻加被力

부처님께 무엇인가를 간구하는 것은 무조건 안된다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구함이 있으면 지옥이요, 구함이 없으면 극락이다’ 라는 법문에 대한 오해입니다.

세상 살이는 그 자체가 괴로움의 연속입니다. 대표적인 괴로움 중에 구부득고(求不得苦)라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즉, 구하지만 얻을 수 없는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조금만 살아 보아도 금방 체득하게 되는 괴로움입니다. 엄마와 어린 아들이 실랑이하는 장면을 시장통에서 자주 목격합니다. 아이는 사달라고 하고 엄마는 모른 체하거나 혼을 냅니다. 그럼 아이는 울음바가지를 토해 내지만, 세상 이치가 그렇다는 사실을 체득하게 되는 값진(?) 순간이지요.

‘구하지만 다 얻을 수 없구나!’

구하는 것이 왜 지옥일까요? 부처님께서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 가난한 이에게 숨은 보배를 얻게 하고 병든 이에게는 어진 의원이 되라는 말씀과는 모순이 아닐까요? 배고프면 빵을 구하기 마련입니다. 몸이 아프면 약을 구하는 것은 인지상정의 도리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도리를 마다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일 리가 없습니다.

빵이 빵으로 끝나지 않고, 약이 약으로 끝나지 않으니까 문제인 것입니다. 빵은 이미 배부른 데도 필요하다 하고, 약은 건강한 데도 필요한 것이 됩니다. 한마디로 불필요한 것을 구하는 욕심 때문에, 빵과 약 자체가 목적이 됩니다. 그래서 지옥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한다는 것은 다른 한편에서는 주는 것입니다. 이 구함과 주어짐이 만나는 접점을 가피(加被)를 입었다고 표현합니다. 쉽게 말해서 무언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특히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질 때 가피를 입었다고들 많이 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언제 어떻게 가피를 주신다는 말일까요?

가피(加被)의 한자를 잘 살펴보면, 더하니까 입는다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길 무작정 기다리며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감나무를 흔들든지 감나무에 오르든지 하여 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감이 떨어지길 기도했더니 감이 정말로 떨어졌다고 합시다. 아마도 기도의 영험이 있어서 가피를 입었다고 난리법석을 떨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누구나 알다시피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감은 떨어졌을 뿐입니다.

부처님의 대자대비는 비가 산천초목을 두루 적시듯이 무차별하지만, 누구는 받았다 하고 누구는 못 받았다 합니다. 여기에서 가피의 원리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보름날 밤, 하늘에 뜬 둥근 달은 교교히 세상을 비춥니다. 하늘에 뜬 달이 강에도 뜹니다. 한강에만 뜨는 것이 아니고, 낙동강에도 섬진강에도 테임즈강에도 뜹니다. 소위 천강지수 천강월(千江之水 千江月)이고 강강수월래(江江水月來)입니다.

강에만 뜨는 것이 아니라 술잔에도 뜨고 여인의 눈동자에도 뜹니다. 뜬 달은 하나건만 나타난 달은 수 천, 수 만 아니 셀 수가 없이 많습니다.

이것이 가피의 원리입니다. 반사체에만 달이 뜬다는 물리적 법칙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나무에도 바위에도 아파트에도 뜹니다. 달빛이 비추이는 곳에 달이 뜬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 우리가 더해야 할 것은 단지 눈을 뜨고 달을 맞이할[加] 뿐입니다. 달빛을 알아차릴 때[被]가 가피를 입는 순간이 됩니다.

우리는 이미 가피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감지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명훈(冥熏) 가피라고 합니다. 새벽에 어둠이 서서히 물러가고 어느새 동이 튼 것을 알듯이, 또 연기로 냄새가 서서히 배이듯이, 가피는 우리도 모르게 그렇게 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게 은근하고, 끊임없이 살려주시는 부처님의 자비 위신력에 대한 체험적인 감흥을 표현할 때 ‘가피를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원공법계제중생 동입미타대원해

願共法界諸衆生 同入彌陀大願海

우리는 한 생명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따로 따로 각각의 생명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래는 한 뿌리입니다. 이것이 진리[法]입니다. 진리의 눈으로 보니 온 세상이 법계(法界)입니다. 진리로부터 온갖 생명들이 제 각각의 모습을 나투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생명의 뿌리를 망각하고, '나'만을 앞세우며 사는 존재가 있습니다. 이렇듯 진리에 스스로 눈 감고 살기에 중생(衆生)입니다. 중생이 있기에 부처님의 자비가 작동합니다. 미망에 사로잡힌 중생의 어리석음과 그로 인한 고통에 대한 측은지심만이 아니라, 중생의 참생명을 꿰뚫어 보는 지혜(智慧)를 토대로 한 자비입니다. 그래서 중생에 대한 부처님의 자비는 무조건적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부처님의 본원(本願)이라고 합니다.

모든 강은 마침내 바다에서 하나가 되듯이 모든 생명은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에 의해서 하나가 됩니다.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건지는 것이 부처님의 원력이기 때문입니다. 건진다는 것은 본래의 참생명을 회복한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의 참생명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참생명은 공간적으로 무한하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를 ‘아미타(阿彌陀)’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미타부처님께 돌아간다는 뜻이 ‘나무(南無)’입니다. 즉 ‘귀명(歸命)’이라는 뜻이지요.

예불문에서 여러 번 되새겨 온 지심귀명례와 맨 마지막 회향게의 뜻이 바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입니다.

예불문의 요지는 내 마음에 부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부처님을 모시면 내 밖에도 부처님이 보이겠지요. 내 밖에 부처님이 보이지 않으면 내 마음에 부처님을 모시지 않은 결과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부처님이 안보이면 그 모습에 속지 말고 예불을 모셔보세요. ‘당신은 부처님입니다’ 하고 예불문을 외우세요. 지심귀명례를 외우세요. 나무아미타불을 외우세요.

그러면 꼭 부처님을 뵈옵게 될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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