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듣기
 

부처님이시여, 시험에 들게 하여주소서!

문사수 2016.01.20 조회 수 10865 추천 수 0

번뇌(煩惱)하십시오.
올해도 참으로 열심히 번뇌하십시오.
지금까지 살아온 그 어느 해보다 더 번뇌하십시오.
악담(惡談)을 하거나 비웃으려 함이 아닙니다. 번뇌는 부모가 주는 것도, 친척이 강요하는 것도, 직장의 동료가 건네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번뇌를 한마디로 이르자면, 자신을 중심(中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받아들이고 있는 독특한 현실감각(現實感覺)이기에 하는 말입니다.


번뇌는 오로지 나의 몫입니다. 나의 몫이란 스스로가 선택(選擇)했다는 뜻이므로, 선택한 번뇌를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만약 바깥에서 온 번뇌라면 도저히 내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바깥에서 온 번뇌를 어떻게 내가 해결합니까? 비록 바깥의 번뇌라고 여겨질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자신의 번뇌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꿔 말해서 번뇌하고 있는, 보다 정확히 표현해서 번뇌를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그것을 풀 수 있는 능력 또한 갖고 있기에 받아들였을 따름입니다.
중3학생이 보는 시험에는 중3의 수준에 걸맞는 문제가 나옵니다. 초등학교나 고등학교 수준의 문제가 나오지 않습니다. 만약에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의 시험문제를 풀고 100점을 맞았다고 해도, 그 100점은 결코 명예스러운 게 아닙니다. 제 수준에 따른 결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수준에 맞는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過程)이 결코 만만한 게 아닙니다. 괴로움의 연속입니다. 그러다보니
“시험(試驗)에 들지 말게 해주소서.”
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 둘에 그치질 않습니다. 헌데 누가 억지로 시험에 들게 했을까요? 학교에 재학(在學)하고 있는 한, 시험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하는 가치판단(價値判斷)을 떠나서 그것은 자신의 선택일 뿐입니다. 이런 자발적(?)인 동기(動機)를 감안해서 선생님이 문제를 내고, 학생은 제 수준에 맞는 시험을 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사실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을 한마디로 이르자면, 번뇌 속에서 깨달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번뇌를 떠난 깨달음을 구하거나, 번뇌한 후(後)에 깨달음을 얻는 게 아닙니다. 번뇌가 일어난 그곳에서, 그때마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음이 그 핵심(核心)입니다. 왜 그러한가? 번뇌를 받아들인 사람과 번뇌를 해결할 사람이 동일인(同一人)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대신(代身)해서 번뇌를 해결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소비자의 수요욕구를 충족시키는 생산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해결사를 자처(自處)하는 종교업자(宗敎業者)가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감히 약속을 합니다. 번뇌를 삶의 영역에서 멀찌감치 떨어뜨려 특별(特別)히 만들어 놓고는, 그 번뇌를 해결해 줄 특별한 비방(秘方)을 이야기합니다. 마치 소비자가 많은 곳에서 장사가 잘되는 원리와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들에게 번뇌를 해결해 달라는 태도(態度)는 초점을 잘못 맞춰도 한참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런 능력(能力)이 있고 없음을 따질 만큼 한가하지 않기에, 단 한 가지만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삶의 주인공은 엄연히 지금 번뇌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직시(直視)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구도자(求道者)라고 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구도자는 특별한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번뇌를 자기화(自己化)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또는 그녀의 나이나 신분과 같은 상대적(相對的)인 입장을 앞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누구나 구도자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번뇌를 스스로 자초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계림(鷄林) 즉, 신라를 떠난 혜초(慧超)스님이 그 멀고도 먼 뜨거운 땅을 걸은 기록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보면, 당시에 구법승(求法僧)들의 목숨을 건 구도심이 절절히 묻어납니다.
다른 사람의 명령(命令)에 의해서 그런 게 아니라, 스스로 맞이한 생사(生死)의 갈림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와중에서 얼마나 많은 번뇌가 들끓었겠습니까?
이와 같이 실크로드는 낭만으로만 점철된 여행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실크로드를 한두 번만 왕복하면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목숨을 담보로 한 많은 상인들 중에서 일부 극소수만이 누릴 수 있던 행운이었습니다. 때로는 양식이 떨어져서, 때로는 길을 잃어서, 때로는 현지인들의 오해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불귀(不歸)의 객(客)이 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구법승들을 비롯한 수많은 상인(商人)들이 그랬으리란 것은 미루어 짐작할 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크로드 위험지역과 위험지역 사이의 곳곳마다 무역의 중심지인 오아시스가 번성하였습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많은 대승경전(大乘經典)들이 오아시스 도시를 중심으로 결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날의 파키스탄에 있는 호탄이라는 곳에서 화엄경·법화경·무량수경 등 주요 경전들이 결집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곧 히말라야와 같이 깊은 산골이 아니라, 떠들썩한 시장(市場)에서 대승불교(大乘佛敎)가 번성하였음을 시사합니다. 
참으로 부지런하게 자신의 참생명을 무한(無限)히 드러낸 사람.
그가 상인라고 불리던 승려라고 불리던 간에, 그들은 모두가 구도자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습니다. 그래서 번 돈이나 습득한 지식은 단순히 자신의 소유물(所有物)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의도하였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그들은 문화(文化)의 전달자(傳達者)였습니다. 이슬람 문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그리스 문화를 인도에 전해서 간다라 미술을 꽃피게 하더니, 중국의 불교미술을 살찌우다가, 푸근한 신라(新羅) 불상(佛像)의 미소를 낳은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원(願)의 주인공들입니다. 다시 상기하자면, 번뇌를 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번뇌를 떠나려고 하지 맙시다. 번뇌를 안고 살자고 작정합시다. 아예 번뇌를 옆에 끼고 사는 그런 구도자로 삽시다. 고생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그 고생한 끝에 먹는 꿀맛 같은 밥 한 공기의 참된 감사를 알겠습니까?


법우님. 지금도 번뇌 속에 사십니까? 현실이 암담합니까?
암담한 번뇌 속에 난 찌들어서 박복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십시오.
“어쩌다가 내가 사람을 잘못 만나서…”
“전생(前生)에 죄를 많이 지어서…”
하는 식의 신세한탄을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허나 그런 딱한 신세보다 언제나 앞서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選擇)이라는 사실입니다. 죄(罪)를 지어서가 아닙니다. 운(運)이 나쁜 게 아닙니다.
시험문제가 내 앞에 출제된 것은, 나의 능력수준에 따른 결과일 뿐입니다. 세상의 어떤 문제라도 나에게 보이고 들린다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나의 삶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해결하지 못한다면, 솔직하고도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생(來生)까지 따라올 내 몫이기에 나에게 지금 나타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번뇌가 일어나면서 현실이 암담하다면, 그것대로 그냥 좋습니다.
삶의 여행을 떠나는 구도자로서 준비는 다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상대적인 입장에 암담해 하지 않고, ‘어떻게 적당히 되지 않겠어?’ 하는 미련이 남아있다면, 이야말로 문제 중의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루 중에서 가장 어두운 때가 해뜨기 바로 직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지금 내 처지가 너무나 어둡다’고 한다면, 이제 남은 건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밝아질 것 밖에 없습니다.
진짜 어두운가요?
그렇다면 됐다 이겁니다. 더구나 내 자신만 번뇌하는 게 아니라 모든 몸 가진 자는 다 번뇌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번뇌한다는 게, 좋고 나쁨의 차원에서 판단할 수 없음도 알았습니다. 이 몸을 선택한 것은 나의 참생명이듯이, 현실을 선택한 것도 나의 참생명입니다. 그러므로 해결할 사람 또한 나입니다.
이런 당연한 진실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우리는 정진(精進)합니다.
익숙한 습(習)의 연장선상에서는 진정한 내가 되지 못한다는 모순(矛盾). 그 모순에서 말미암은 번뇌에 눈감는 것이 아니라, 두 눈 부릅뜨고 숨겨진 삶의 진실이 드러나도록 염불(念佛)합니다.


이제 사실(事實) 그대로를 살아갑시다.
번뇌는 깨달음의 반대말이 아니라, 알고 보니 내가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징후입니다. 번뇌가 일어날 때마다, 무한광명(無限光明)이 드러날 전조(前兆)로서 어둠이 온 것입니다. 그러니 번뇌의 주인공이요, 뒤집어서 얘기하면 깨달음의 주인공으로서 새삼스레 할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어! 시험(試驗)에 들지 않게 하지 마시고, 언제 어느 곳에서나 시험에 들어, 번뇌(煩惱)의 무한함 속에서 깨달음의 무한함이 이루어지이다”
하며 발원할 따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넉넉한 마음을 항상 간직하면서, 다만 번뇌에 나무(南無)! 하기밖에 더 있겠습니까?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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