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듣기
 

찬탄과 해석의 갈림길

문사수 2014.09.30 조회 수 18173 추천 수 0

 지진대피 훈련 시 주의사항을 들어보니 제일 먼저 거론한 것은, 급하면 있는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있는 그 자리에서 즉시에 엎어지라는 겁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자기가 있던 건물에서 빠져나와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지진대피 요령을 듣고 있다가, 문득 부처님을 뵙는 것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법당에 들어올 때마다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며 절을 올리는데, 절부터 모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낮은 자세로, 평상시 내가 믿고 의지하는 상대적인 모든 것들이 궁극적이지 않음을 먼저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면적인 포기와 동시에 부처님과 마주하는 자기도 부처님생명임을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법화경에선 이처럼 지적하십니다.
 “네가 의지하며 살고 있는 세상이 불타고 있다. 세상이라는 집에서 빨리 나오라!”
 맞습니다. 빨리 나와야합니다. 지진이 나면 빨리 엎어졌다가도 마침내는 건물에서 빠져나와야 되듯이 말입니다.
온통 상대적인 것들로 가득한 세상은 나의 참된 의지처가 아닙니다. 삶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삶의 근본으로 돌아간다 함은 나의 참생명이신 부처님생명을 맞이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과연 부처님을 어떻게 맞이해야할까?

 “더 이상 법문(法門)이 들리지 않는다”거나 “그만하면 법문을 많이 들었다”면서, 부처님에 대해서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단정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런 착각의 뿌리는 깊고 또 넓습니다. 정황은 대략 이렇습니다.
 먼저 스스로 그 자체와 본질적으로 만난 적도 없으면서 남에게 들은 얘기나 추측의 잣대에 기댑니다. 언제부터 남의 말을 그리도 잘 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인지 거짓인지의 점검할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다음에는 단호한 표현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답에 상응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순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표변하는 것은 이어지는 수순입니다.

 왜 그럴까?
 한마디로 말해서, 사실(事實)보다는 사실에 대한 해석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좀체 숨겨진 의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정당성을 확보할 손쉬운 태도입니다. 나의 생각이나 나의 입장이나 나의 자존심과 같은, 도대체 참으로 있지도 않은 현상들이 마음 바닥에 가득히 깔려 있는데 말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판정한 사건이나 사람 또는 사물을 핑계 삼다 보면, 어느새 부처님마저 외면(外面)하고 맙니다. 비록 나를 내세운다는 말을 하지 않을지언정, 그 속내는 서릿발처럼 세상을 심판(審判)하고 말겠다는 사명감으로 불타오릅니다. 사건에 익숙하고, 하던 일에 익숙하고, 만나는 사람에게 익숙한 ‘나’만이 남아 있기에 그렇습니다.
 마침내 처음에는 그리도 신선하고 그렇게 감격스러웠던 삶의 진실은 어느새 뒷방 차지가 되고 맙니다. 무한한 생명의 세계를 고정시키고 나와 대립시킨 결과이지요. 

 이런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부처님을 찬탄(讚嘆)할 여지가 없습니다.
왜 그러한가?
 “부처님이란?”에 맞는 답을 벌써부터 내린 결과입니다. 그러면서도 부처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해와 달이 사라지는 그날까지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설령 형식적으로라도 부처님을 대한다고 하지만, 실은 부처님을 또 다른 중생(衆生)으로 보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일대기는 상대적인 잣대가 얼마나 놀라운 모습과 다양한 종류로 휘둘러지는 지에 대한 적나라한 기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위험한 사람”이라거나 “파렴치한 행동으로 이익을 취한다”거나 “사회의 기강을 무너뜨린다”는 식의 비방이 넘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하이라이트는 저 유명한 제바달타 아닙니까? 부처님의 사촌동생이요 촉망받던 제자였던 사람이지요.
 그가 부처님께 칼 들이대며 괴롭힌 이유는 별스러운 게 아닙니다.
부처님이 원칙을 지키지 않은 배반자(背反者)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심판의 기준은 제바달다 자신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내린 답에 맞지 않는 부처님에게 화가 나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스스로 화를 못 참아서 지옥의 고통 속에 죽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내린 결론에 의해서 쫒기는 사람은 찬탄이 불가능합니다.
내 식의 찬탄은 상대적이기에, 언젠가는 비난의 얼굴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을 만난다는 사실은 무엇일까?
 부처님을 원리적으로 말하자면, 오실 것도 없고 가실 것도 없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고, 모든 현상들의 원천이십니다. 광대한 우주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가 하면, 극히 미세한 입자라도 가득 채우지 않은 적이 없는 무한 그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무한생명, 무한광명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엄청난 소식마저 석가모니부처님의 법문(法門)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8만4천으로 상징되는 법문의 내용 그대로가 부처님이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나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 한, 무한 그 자체이신 부처님은 너무나 구체적입니다. 바로 석가모니부처님이 그 주인공이십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출현으로부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들이 세상의 빛으로 나투신 것입니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가만히 살펴봅시다.
 흔히 부처님을 무척 쉽게 만나는 분으로 알고 있지만, 시간의 축적으로만 따져서 적어도 3천년의 세월입니다. 3천년의 세월을 거친 부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한 공간감각으로만 보더라도, 저 먼 인도로부터 해 뜨는 동쪽나라 이 땅에 부처님이 오십니다.
 3천년의 세월동안 수많은 분들의 치열한 구도심을 담은 남자와 여자의 몸을 통해서 증명된 가르침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나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한때는 펄펄 끓는 모래언덕을 지나기도 했고, 어느 때는 피와 살이 튀기는 처참한 전쟁터를 거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나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심신(心身)에 가득한 무한한 부처님생명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말입니다.
 그들이 조사(祖師)로 불렸거나 혹은 선지식으로 모셔졌거나 또는 은둔했거나 하는 역사적인 평가는 중요치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명 내용으로 살았다면, 그 분들은 부처님생명을 산 또 다른 부처님들이기 때문입니다.
 시공간을 꽉 채운 이런 생명운동이 오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모든 과정을 통해서 부처님을 만나는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이 어찌 새삼스럽겠습니까? 멀리서 찾을 것도 없습니다.
 바로 당신, 법문을 들으며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을 사는 법우입니다. 당신이외에 누가 따로 있겠습니까?
찬탄하나이다, 나의 법우여!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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