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두 가지의 기본적인 태도에 근거합니다.
먼저 인과론자(因果論者)임을 천명하는 것이 그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정진론자(精進論者)로 살아가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그럼 인과론자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법칙을 전면 수용하는 사람이 인과론자입니다.
고정된 자기의 입장을 앞세우면서 취하거나 버리는 식의 선택을 하는 게 아닙니다. “왜 그러냐?”거나 “하필이면 나냐?”고 따지고 들 새 없이, 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현상을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관적인 해석이 아니라, 벌어진 사실만을 마주하는 태도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원수는 어디서 만난다고 하지요? 네. 외나무다리에서 만납니다.
도대체 우연치고는 너무나 필연적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런 현상을 대하고 호들갑을 떨면서 우연인지 필연인지를 따지는 것은 하릴없는 일입니다. 인과(因果) 즉 원인에 따르는 당연한 결과이기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내가 맞이하는 경계(境界)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어떤 모습과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해도 결코 나의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만나는 경계는 내가 불러온 결과입니다. 그러니 원수를 피하려고 한다고 해서 원수가 사라지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세상 사람들을 다 용서할 수 있어도 그 사람만은 용서 못해!”, “나는 지난 일들을 다 잊을 수 있겠지만, 그 사건은 못 잊어!” 라고 하는 강한 부정은 오히려 강한 인상을 남기면서, 역설적이게도 도리어 기억을 또렷이 합니다.
이게 바로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도리입니다. 도대체 원수라는 게 무엇입니까? 나와 만나는 대상을 뜻합니다. 그럼 왜 만나게 되는가? 내가 그 대상을 만남으로써 해결해야 할 게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아니면 사건이든, 원수는 나로 말미암아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즉 원수는 나의 상대로서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나에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는 한, 원수와 나는 반드시 만나야 한다는 역설이 성립됩니다.
물론 나의 원수가 다른 사람에게도 원수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경우가 다릅니다.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서나 객관적인 원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는 실체가 아닙니다. 상대적인 관계에 의해서 내가 내린 주관적인 평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굳어져있지 않습니다. 오늘도 태어나는 것을 일러 생명이라 합니다. 어제까지는 바보 같은 짓을 했을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사악한 짓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제까지는 실패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태어나고 있는 생명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나에게 닥치는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전면 수용함과 동시에, 새로운 인연의 주인공으로 사는 태도가 인과론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진론자(精進論者)는 어떻게 사는가?
예부터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천 냥 빚을 갚는다는 것은 호락호락한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 좋은 결과가 나오려면 ‘말 한마디’라는 원인이 우선해야 합니다. 천 냥을 갚는 게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지금 생명을 만나서 말 한마디를 잘만 하면 완전한 생명의 교류가 이루어집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빚만 갚으면 더 이상 걱정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비록 빚이 제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산다면 그건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빚의 유무와 같은 상대적인 경계(境界)에 상관치 않으면서, 무한한 자기 생명의 가치를 내어 쓸 줄 아는 사람이 곧 정진론자입니다.
삶의 결과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머물지 않는 무한한 생명의 가치를 누리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 정진(精進)입니다. 자기 생명의 정수를 모아서 나아간다는 뜻이 정진입니다. 생명의 가치를 지금마다 누리지 못한다면, 물이 고이면 썩는 이치와 같기에 다만 정진에 매진할 뿐입니다.
이와 같이 인과론자면서 정진론자로 사는 삶을 한마디로 이른다면, 스스로 경계를 부른 결과에 따라서 경계가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계도 결코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 경계를 부르는 사람이 나이기 때문입니다. 경계를 부르니까 경계가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철소에서는 쇠를 단단하게 하려고 탄소를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쇠가 단단해지는데, 경계는 마치 탄소와 같습니다. 내가 부른 경계가 내 생명을 강하게 하고, 내 생명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나를 해하려고 경계를 불러온 게 아니란 겁니다. 눈을 감았다 그래서 경계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경계를 피한다고 해서 만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만 벌어지는 것이 경계라면, 그 경계를 해결하는 능력도 나에게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경계가 나에게 닥치는 순간이야말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기회(機會)임을 의미합니다. 인과론자는 무조건 받아들입니다. 다만 “네!”합니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오직 “네!”합니다. 그렇다면 삶의 목적은 유일하고 명확해집니다. 끝없는 시간과 공간의 교차 그리고 숱한 인간관계로 얽힌 인연의 주인공으로 자리합니다. “생명이 생명다울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만이 과제가 될 뿐입니다.
생명이 생명다움으로서 무한한 성장의 기회를 발견하기에, 지나간 일을 탓하고 있을 새가 없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벌어졌지만, 이미 끝난 상황임이 분명합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로 아쉬운 사건일 수 있습니다. “그때 조금만 그랬다면”, “보다 따뜻한 말을 했다면”. “그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면”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납니다. 이때 우리는 인과론자임을 상기합시다. 인과론자는 항상 “네!”할 따름입니다. 그러면서 경계가 왔을 때, “나는 이 경계를 통해서 어떤 기회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니 모든 법우들이 경계의 주인공으로서 어떤 경계가 와도 그 경계의 주인공으로 살기를 축원하고, 그 축원의 마음이 다시 만나는 인연들에게 찬탄의 씨가 되도록 정진하기로 합시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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