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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도 아미타불, 저녁에도 아미타불

문사수 2011.12.26 조회 수 25387 추천 수 0

아침에도 아미타불, 저녁에도 아미타불

 강의가 한창 진행 중일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알듯 모를 듯한 얼굴표정을 하고 있음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보살의 원력에 대하여 침을 튀기며 나름대로 열을 내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다시 논의의 원점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는, 너무나 쉽게 넘어가리라 여긴 질문을 던졌습니다. 즉 “보살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동시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가 그때 한 질문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나의 의도와는 십만 팔천 리 비껴가는 게 아닌가요?
 처음은 제법 점잖게 시작되었습니다.
 “보살이란 보디사트바(Bodhisattva)라는 산스크리트어를 중국어로 음사(音寫)하다 보니, 보리살타가 되었는데 이를 줄여 말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앉은 분들이 “야!” 하는 감탄사를 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더해 몇 분의 교학적인 보충이 이어졌습니다.
 흐뭇한 마음으로 이제는 됐다 싶어서, 조금만 더 본래의 종교적인 의미를 가미하면서 강의를 진행하려고 하는데, 어떤 분이 중얼거리듯이 그러나 조금은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보살!’하는 소리를 들으면 여자 불교신도가 떠오른다.” 이게 도화선이었습니다. 또 다른 분이 “아냐, 나는 절 공양간에 있는 공양주 보살이야!” 그러자 좌중에서는 “와!”하는 웃음이 터졌습니다. 이왕 내친김에 한 번 더 물어보자 하는 생각이 들어, “또 다른 분은요?”하였습니다. 그러자 서로 얼굴을 쳐다보는 빈도가 잦더니 마침내 한 분의 입이 열렸습니다. “점(占)집의 보살이요!”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였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답보다도 대중들의 반향은 컸습니다. 어림짐작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본래의 뜻이 와전되거나 의도적인 왜곡을 통해 이해되는 경우, 그 이름은 본래의 뜻을 담은 언어로서의 생명력이 축소되거나 아예 소멸되기까지 합니다.
 반면에 사람들이 이미지가 유사한 이름을 찾아내어 동일시하려고 할 때, 불리워지는 대상 자체와는 전혀 색다른 의미가 살아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름과 이름값의 차이는 비교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 이름이 뜻하는 내용대로 산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억지로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밑바닥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이미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요?

 다음과 같은 반어법적(反語法的)인 말 속에는 그 진실이 숨 쉬고 있습니다.
 “늙으면 죽어야지!”하는 말이 상식적으로 옳다는 데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합니다. 그런데 요즘의 젊은 사람들은 이 말을 비상식적으로 구사합니다. “죽으면 늙어야지!”가 곧 그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부정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쓴웃음을 동반한 의미의 되새김질이 발동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발동하는가?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현상적으로는 육체의 죽음에 한정시킵니다. 즉 죽음이란, 순차적인 시간(時間)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라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진행되기에 그렇다는 말인가요?
 태어남의 시점부터 시작하기로 합시다.
우선 우리에게는 관찰 대상이 필요하니까, 지금 막 태어난 어떤 아이를 선정합시다. 이 아이는 백일을 무사히 넘기더니 돌잔치 상을 앞에 두고는 방긋 웃습니다. 그러더니 어느새 유치원을 거쳐 학교에 입학합니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도 별 탈 없이 졸업하더니 벌써 어엿한 사회인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꾸 채근하기 시작합니다. 빨리 결혼하라는 것이지요. 결혼 후 2세를 두고 중년에 접어듭니다. 어느 날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다가 깜짝 놀랍니다. 귀밑에는 희끗희끗 한 머리카락이 제법 많습니다. 또한 친하던 친구들이 하나 둘 세상을 하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마지막으로 자리할 곳은 어디일까?’를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병원의 영안실? 아니면 어디 있는 공원묘지? 또는 화장터 앞마당?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는 우리들의 모습은 대략 이럴 겁니다.
그렇다고 삶의 질(質)마저 같은 모습으로 획일화되어 있다면, 남들도 다 그러니까 안심이라도 되련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삼천대천세계라는 말이 시사하듯 각자마다의 세계가 따로 있기에, 비록 외면적으로는 같은 경우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사뭇 다릅니다.
아무튼 어디론가 무엇이 되고자 끝없이 무작정 갑니다. 아닙니다. 무작정이 아닙니다. 비록 말들은 없어도 죽음을 향해 남에게 뒤질세라 빨리도 달려갑니다. 이런 자기를 마주하는 순간 오로지 닥치는 것은 불안과 공포 이외의 다른 이름이 붙지 않습니다.
이런 약속된 죽음을 향한 도정이 시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런 시간의 정체를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시간의 노예가 되어 사는 순간이 바로 죽음이라는 사실을 생명의 감각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죽으면 늙어야지!”라고···

 그렇다면 우리의 참된 이름값은 무엇일까요?
 시간의 배열선상에 있는 한 우리가 무엇이라고 불리던 그것은 우리의 참이름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부르는 철수나 영희가 아닙니다. 아버지나 아들도 아닙니다. 과장이나 부장도 아닙니다. 주인도 손님도 아닙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우리의 생명약진이 시작됩니다. 육체는 그대로이나 새로운 참생명의 자각이 움트기 때문이지요. 태어나는 순간의 소박함을 회복하기 때문이지요.
 
그럼 우리의 기억테이프를 되돌려 봅시다.
 그 태어남의 진상은 이렇습니다. 태어나는 내가 나의 힘으로 태어난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맡겼을 뿐입니다. 생명이 생명 구실을 하는데 있어서 전제조건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맡기고만 있었습니다. 좁게는 부모로부터 넓게는 우주의 티끌 하나까지도 나의 탄생을 돕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명은 온 우주가 참여한 위대한 탄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원래 우주생명입니다. 그렇다고 우주생명이라는 말이 별스런 말로 생각하지는 맙시다. 곧 부처님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생명으로 태어났습니다. ‘부처님생명!’ 이것이 우리의 참이름이며 그 이름값입니다.

 이제 우리의 참이름을 언제 어느 곳에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잊는다면 육체생명을 나로 알고 죽음의 공포에 떨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염불(念佛)을 합니다. 아침에 했으니, 저녁에는 쉬자는 말은 죽음의 유혹과 다르지 않습니다. 때문에 아침에도 아미타불, 저녁에도 아미타불입니다. 몸과 입과 생각이 하루 종일 아미타 즉 무한생명 · 무한광명이니, 만나는 사람마다 아미타불이고, 하는 일마다 원만한 성취가 기다립니다. 이렇게 아미타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이름값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를 일러 칭명(稱名)이라 하지 않던가요? 자, 함께 염불합시다.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으로 살고 있으니, 아침에도 나무아미타불! 저녁에도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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