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행복이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는 다양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행복’이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실로 행복해지기 위해 삽니다. 그런데 세상에 인류가 처음 등장한 이래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왔기에 지금쯤은 누구나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음 직도 한데, 아직 그렇질 못합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렇다면 행복해지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떤 것이 행복인지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모으거나, 지위가 높아지면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해서 이러한 것들을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것들은 얻기도 힘들고, 어느 정도 얻었다 하더라도 만족하기는 더욱 힘들며, 설령 어느 정도는 만족한다 하더라도 끝내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남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아무리 재산을 많이 모으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더라도 죽으면 그만이기에, 지금 당장 죽는 것은 아닐지라도 마음 깊은 곳에는 항상 죽음에 대한 공포가 떠나질 않습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행복에 대한 그 어떤 논의도 헛될 따름입니다.
부처님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이에 대한 가르침을 일러주시는 분입니다.
《법화경(法華經)》 비유품(譬喩品)에서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은 불타고 있는 집과 같으니 그곳에서 빨리 나오라고 하십니다.
불타고 있는 집은 바로 생사(生死)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궁궐 같은 집에 있다고 해도 그 집이 불타고 있다면 얼른 뛰쳐나와야 하는 것처럼, 제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해도 죽음 앞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기에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생사(生死)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佛敎)는 부처님[佛]의 가르침[敎]입니다.
부처님은 깨치신 분이기에, 불교는 깨침의 종교입니다. 무엇을 깨치는 것이냐 하면, 우리의 참생명이 본래부터 부처님생명임을 깨치는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쳐서 부처가 된다고 할 때, 결코 중생이 부처로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참생명이 본래 부처님생명이기에, 부처가 부처로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생명인 우리의 참생명은 절대무한생명입니다. 남들과 대립하고 다투며 살아가다가 끝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대유한의 육신생명은 결코 우리의 참생명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절대무한세계를 살고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절대무한세계라고 해서 어디에 따로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절대무한세계가 상대유한세계를 떠나 따로 있다면, 그 이름이 절대무한일지라도 그것은 상대유한에 지나지 않습니다. 절대무한세계는 오직 절대무한 그것밖에 없는 세계입니다.
절대무한세계는 나와 남을 구분 짓는 울타리가 없습니다. 온 천지에 그것밖에 없는 세계이므로 오직 일인칭만 있는 세계입니다. 원수(怨讐)로 여겨서 생존경쟁을 벌이던 사람들이 알고 보면 모두 한 생명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참생명은 무한생명이기에 나고 죽는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처님께 예경을 올리는 것은 부처님께 복을 달라고 빌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온 우주에 부처님 말고 다른 존재는 있을 수 없음을 믿고, 이러한 부처님생명이 나의 참생명임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또한, 더 이상 몸뚱이를 위해서 살지 않고, 나의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이 가지고 있는 절대무한의 생명가치를 실현하며 살겠다는 다짐이 바로 부처님께 올리는 예경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독송할 때마다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인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하다고 외웁니다. 몸뚱이인 색(色)과 정신작용인 수상행식(受想行識)이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몸뚱이는 우리가 부처님가르침을 공부하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을 동안 이 몸뚱이를 가지고 부지런히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의 참생명은 몸뚱이가 생겨날 때 생긴 것도 아니고, 몸뚱이가 없어질 때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에서 우리의 참생명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일러주십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 없어질 몸뚱이지만, 이 몸뚱이에 대한 집착을 떨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몸뚱이는 내 생명의 전부가 아님을 자꾸 일깨워야 합니다.
이를 일깨워주는 소리가 있으니, 바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입니다.
‘나무’는 귀명(歸命)으로서 본래의 참생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아미타불’은 절대무한인 참생명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꾸 “나무아미타불”을 불러 참생명을 일깨워야 합니다.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스스로의 참생명이 아미타생명임을 일깨우고, 나의 참생명이 본래 부처님생명임에도 스스로를 중생으로 착각하는 어두운 마음을 없애기 위함이며, 결코 육신생명이 내 생명의 전부가 아님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불러서 결코 몸뚱이가 참생명이 아님을 확고히 믿으면, 나중에 몸뚱이를 버려야 될 때, 즉 죽을 때 공포에 떨지도 않을 뿐더러, 또 다른 몸뚱이를 갖기 위해 헤매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윤회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으니, 더 이상 생사(生死)를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몸뚱이를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할 일은 자꾸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는 것입니다. 염불로써 스스로를 중생이라고 생각하는 어두운 마음을 밝혀서, 우리가 본래부터 절대무한의 부처님세계를 살고 있음을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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