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듣기
 

본대로 들은대로 살아갈 뿐

문사수 2010.05.30 조회 수 23934 추천 수 0
 본대로 들은대로 살아갈 뿐

오늘날의 세태를 볼 때, 먹는 것과 입는 것에 관한 사치(奢侈)가 점점 극단(極端)으로 치닫고 있다는 느낌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에도 사치스러운 풍조가 유행하곤 했었지만, 인류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물질적 번영과 풍요로움을 누리는 현대사회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반작용(反作用)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습니다.
단순히 유행이 지났다는 이유로 멀쩡한 옷이 마구 버려지고, 젓가락 한번 닿지 않은 반찬들이 예사로이 수챗구멍으로 쓸려갑니다. 실로 너무나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입는다는 것과 먹는다는 것의 본질에 걸맞은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취하고 누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상황을 두고 중국 북송(北宋) 때의 재상(宰相)이었던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목식이시(目食耳視)’라는 말을 했습니다. ‘눈으로 먹고[目食], 귀로 본다[耳視].’ 이 말은 음식을 맛에 상관없이 보기에만 좋게 차려서 단지 눈에만 그럴듯하게 보이고, 옷이 몸에 맞는지 안 맞는 지에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남의 눈에 화려하고 예쁘게 보이도록 입어서 남이 칭찬해주는 말을 듣고 귀를 만족시키려는 행태를 뜻합니다. 겉치레만을 중시 여겨서 헛된 사치를 일삼는 세태를 경계하는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송광사(松廣寺)의 조실(祖室)이셨던 구산(九山)스님이 하신 다음의 법문은 이러한 세태에 관하여 시사(示唆)하는 바가 큽니다.
“몸뚱이만 있고 마음이 없으면 이를 일러 ‘시체(屍體)’라고 한다. 또한 마음은 있으나 몸뚱이가 없다면 이를 일러 ‘귀신(鬼神)’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몸뚱이는 있는 줄 알면서 마음이 있는 줄은 모르고 그저 바쁘게 사는 존재가 있는데 이를 일러 ‘중생(衆生)’이라고 한다.”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스스로의 생명가치를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시체나 귀신이나 중생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옆집 아이에 비해 성적이 신통치 않은 우리 집 아이의 성적표를 보면 열이 확 오른다거나, 동창회에 나갔는데 돈을 많이 번 친구 앞에서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진다거나… 이런 것들에 끄달리고 있다면 구산스님께서 말씀하신 시체, 귀신, 중생, 이 세 가지 유형의 삶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재산이 많아서 잘못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재산, 학식, 지위, 건강 등 이러한 것들은 삶의 조건일 뿐, 결코 삶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들을 아무리 쫓아간들 결코 행복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끝내 상대유한(相對有限)이기에 그렇습니다.

헐떡거리며 조건들을 쫓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다가 자기 뜻대로 안되면, 남편 탓, 부인 탓, 자식 탓, 부모 탓, 조상 탓, 직장 탓… 이렇게 자기 아닌 다른 대상에 ‘~탓’자(字)를 붙여 책임전가(責任轉嫁)를 예사로 합니다.
이러한 책임전가는 무엇에 근거할까?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분리할 수 없다고 여기는 최소한의 개체로서 ‘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뜻하는 단어가 한자로는 ‘개인(個人)’, 영어로는 'individual'입니다. ‘개인(個人)’은 낱낱의 사람을 의미하고, ‘individe’는 나눌 수 없다는 의미이기에,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나’의 존재를 상정(想定)하는 것입니다.
사회의 최소단위인 가족공동체 내에서도 부모 자식이 다르고, 형제 자매가 다르며, 부부 사이라 할지라도 남편과 아내가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나누고 나누어도 끝내 나누어지지 않는 ‘나’,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나’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을 우리는 무척이나 당연시합니다.
이러한 ‘나’에 대한 존재감은 이 ‘나’가 처한 상황이 바람직하지 않은 국면으로 흐를 때, 그 원인을 ‘나’ 아닌 다른 존재, 즉 ‘너’에게서 찾으려는 시도를 불러일으킵니다. ‘나’가 있는 한, 이 ‘나’는 책임전가(責任轉嫁)의 비겁함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라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분명 지혜롭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남을 원망하고 있는 동안 원망하고 있는 그 당사자는 과연 마음이 편안할까? 그렇게 남의 탓을 한다고 해서 처해진 상황이 호전될까?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일시적인 자기위안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책임전가로 점철된 삶, 그러한 삶이 개선될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기껏해야, “나는 한다고 했지만,…”이라는 궁색한 변명이나 일삼는 초라한 자기만족의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게 되는 이유는 ‘나’를 양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가 앞서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너’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내 주위에 있는 익숙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을 모르게 됩니다.
익숙함은 편안함을 주지만, 여기에는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익숙하다 보니까 귀한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익숙한 부모님, 익숙한 남편, 익숙한 아내, 익숙한 아들 딸, 정작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어려워할 줄 모르고,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반면에 어쩌다 한두 번 만나는 사람은 무척 반가워합니다.
사실, 매일 만나는 사람이 더 반가운 사람 아닐까? 매일 만나는 사람에게 더 잘 대접해야 하지 않을까?
매일 만나는 익숙한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히 시답지 않게 여겨지기 시작한다면, 그 즉시 우리는 지옥에 태어나게 됩니다. 익숙한 사람을 예사로이 데면데면 대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주어진 수많은 기쁨을 외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만남이 주는 기쁨을 훗날의 기쁨으로 미루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기쁨은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주해야 하는 것은 바로 ‘오늘 보고 듣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오늘 보고 듣는 것’보다 더 절박한 것은 없습니다. 보고 듣는 것 속에서 영위되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고 들음에 있어서 놓쳐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보고 듣는 주체만으로는 결코 보고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보이고 들리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눈은 스스로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눈이 있음을 아는 것은 눈이 눈을 봐서 아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상에 말미암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가 드러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눈의 존재가치가 눈에 보이는 대상에 말미암듯이, ‘너’라는 존재가 있음으로 해서 ‘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 혼자서는 결코 ‘나’ 자신을 알 수가 없습니다. ‘너’라는 상대를 통해서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연의 필연성(必然性)입니다. 우리는 인연을 맺지 않고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금생(今生)에서의 인연이 다하여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업경대(業鏡臺)라는 거울을 통해 그 사람의 지난 생(生)을 비추어 보며 심판한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착한 일 많이 하며 살라는 의도에서 지어낸 상상력의 산물만으로 치부하기에는 그리 만만치 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염라대왕은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입니다. 염라대왕이 무서워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염라대왕이 두려운 것입니다. 또한 염라대왕 앞에 놓여있는 업경대는 우리가 지은 업(業)이 그대로 투영(投影)되는 스크린입니다. 따라서 염라대왕의 심판대에 서는 것은 반드시 죽은 후의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매순간마다 염라대왕의 심판대에 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내일이 온다고 하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지금 보고 듣는 것입니다.
미래를 보고 들을 수는 없으며, 과거에 보고 들은 바를 지금 다시 만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보고(目) 듣고(耳) 하는 것밖에 믿을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듣는 것일까?
내 안목 이상은 보지 못합니다. 내 수준 이상 듣지는 못합니다. 오직 내가 본 것만큼, 내가 들은 만큼만 살아갈 따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눈으로 먹고 귀로 보는[目食耳視] 이런 말도 안 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눈으로는 봐야 되고, 귀로는 들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참생명으로 보고 들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눈으로 보고, 부처님의 귀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 본대로 들은대로 삶을 누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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