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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

문사수 2010.09.04 조회 수 23739 추천 수 0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

 
법화경에 상불경보살품이 있습니다.
 상불경(常不輕)보살이란 ‘남을 가볍게 보지 않는, 무시하지 않는, 경시하지 않는, 항상 남을 얕잡아 보지 않는 보살’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아주 옛날에 어느 수행자가 있었는데 이 수행자는 특별히 공부하는 게 없습니다. 참선을 한다든지 염불을 한다든지, 특별히 경을 공부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누구에게든지,
 “나는 당신을 공경합니다. 당신은 부처가 되실 분이기 때문에 결코 당신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고 하며 절만 하고 다닙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듣기 싫다고 야단이라도 치면,
 “당신이 그렇게 듣기 싫다고 야단치고 욕을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조금도 미워하거나 가벼이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부처가 되실 분이기 때문에 공경합니다.”
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화가 나서 뺨을 때리려고 합니다. 그럼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뒤로 한 발짝 물러나서,
 “당신이 나에게 손찌검을 하고, 뺨을 때려도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부처가 되실 분이고, 그래서 난 당신을 공경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손이 닿지 않으니까 그 다음에 몽둥이로 때리려고 합니다. 그러면 또 한발짝 물러나서,
 “당신이 몽둥이질을 하고 나를 해롭게 할지라도 나는 당신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당신은 꼭 부처가 되실 분이란 걸 믿습니다.”
라고 하며 공경합니다. 몽둥이가 안 닿으니까 그 다음에는 ‘그런 소리하지 말라’며 돌을 던집니다. 그러면 또 돌이 닿지 않을 만 한 거리로 물러서서,
 “당신이 나에게 돌을 던지고 나를 욕해도 당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당신은 꼭 부처가 되실 분입니다.”
라고 합니다. 이러고만 돌아다니니 그 사람의 별명이 어느 누구든지 가볍게 보지 않는다고 해서 상불경보살이라고 붙여졌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이렇게 남을 공경하는 마음으로만 지내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처가 되셨다는 것은 그렇게 모든 사람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지냈던 결과로 부처님이 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처된다는 것은 이 세상 사람을, 내 주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부처님으로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이 우리에게 열리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절에 가서는 불상을 향해서 부지런히 절을 합니다. 그런데 나와서는 같은 법우끼리도 그렇고, 법우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차별의식을 가지고 남을 얕잡아 보고, 남을 흉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것은 부처님께 예배하는 공부를 하는 곳이 법당인데, 공부하고 연습할 때는 부처님한테 절하는 것처럼 하다가 진짜 부처님을 보고는 절을 안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러므로 법당에 가서 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법당에서 공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말 부처님께 예경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므로, 주변에 나투신 부처님께 예경해야 합니다. 어찌 부처님이 법당에만 계시고 다른데 안계시단 말이 있을 수 있습니까?

 금강경에서 참으로 상(相)이 없다고 배웠습니다. 겉모양은 참으로 없으니 겉모양에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즉 겉모양으로 봐서 나쁜 사람으로 보이고, 겉모양으로는 멍청이로 보이더라도 그 모양에 속지 않고 알맹이만 본다면 세상사람 전부가 부처일 뿐, 부처 말고 다른 것은 있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부처생명이란 것이 어느 누구에게는 있고 다른 누구에게는 없다면 어떻게 그것을 부처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항상 강조하여 이야기하는 바처럼 부처생명은 절대 무한인 아미타입니다.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도 그것밖에 없는 그것이 무한절대인 아미타, 즉 부처생명입니다.
 때문에 그 부처님생명 말고 다른 생명이 또 있다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으며,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부처님을 욕하는 것이 됩니다. 김 서방, 박 서방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님생명의 결함을 말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결함 있는 부처님생명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어머니나 시누이가 내 눈에는 아무리 밉게 보이더라도 참으로는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겉모양에 속지 않고 보는 지혜를 열게 되면 그 모든 사람이 부처님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되지 않기 때문에 자꾸 절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법당에 가서 자꾸 최소한 108배라도 해야 합니다. 108배를 하면서 ‘내가 당신한테 절하니까 나한테 복 좀 주세요.’가 아닙니다. 절의 참 뜻은
 “이 세상사람 모두를 부처님으로 보는 마음의 지혜가 저에게 열려지길 바랍니다.”
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부처로 보듯이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내 부모를, 내 형제를, 내 남편을 전부 부처님으로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이 나에게 열려지이다.’ 하는 마음으로 절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진하는 것은 ‘당신과 같은 생명내용으로 살겠다.’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절할 때나 정진하면서 발원할 때,
 “당신께서 이 세상사람 전부를 부처님으로 모시듯이 저도 세상 사람을 모두 부처님으로 보는 지혜의 눈을 열게 해주십시오.”
하는 것이 발원의 원칙입니다.
 우리 궁극의 목적이 부처님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궁극의 목표인 부처가 되었을 때 어떻게 사는 것이냐?가 궁금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하심하는 분이 부처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되는 과정의 공부를 한다면 ‘스스로를 낮추는 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는 우리의 입장은 대접하는 쪽이지, 대접받는 입장에 서는 게 아닙니다.
 서양에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바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좋은 말이 있습니다. 참 좋은 말이지만 불교에서는 이조차 용납되지 않습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생각조차도 갖지 않습니다. 다만 이쪽에서 대접만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대접받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습니다. 다만 공경해주면 그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생활은 항상 남을 공경하는 것으로만 일관된다는 것을 여기서 배웠습니다. 이것을 생각으로만 알고 있어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들 실제 생활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의 아들이 공부를 꽤 잘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삼수생입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아니면 안 된다고 삼수를 시키니 그 아들은 죽을 지경입니다. 작년엔가는 고려대 의과대에 붙었는데 안 보내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자기 체면상 절대 서울대학교 외에는 보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는 자식의 존귀한 면을 보지 못하고 자기 소유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자식 또한 법우(法友)입니다.
 자식을 그렇게 볼 수 있을 때는 이 세상 모두를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 누구에 대해서도 나보다 돈이 부족하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나보다 학식이 모자라다고 무시하는 행동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한 어떤 종교에서는 인간을 위해서 다른 동물들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 또한 생각해봐야 합니다. 어째서 사람이 먹기 위한 다른 동물이 있겠습니까?
 개나 돼지가 세상에 태어날 적에 ‘난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하겠어요? 그런 생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남의 생명을 나를 위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절대 평등의 세계에서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가짐을 가질 때 사회적이나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전쟁이라든지 또 혹은 공해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보게 되면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전쟁은 있을 수가 없고, 또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공해는 생길 수가 없습니다. 공해라는 것도 내가 경제적인 이득을 보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마음을 내포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시급한 일은 모든 생명을 가장 값있는 존재로 인정하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참생명을 찾아가는, 그래서 참생명을 존중하는 불자(佛子)가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회를 우리 만들어가야 되겠습니다. 그 시작이 우리들 주변부터, 가족부터 존중하는 것이겠지요.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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