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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력의 힘을 자각하자

문사수 2010.08.03 조회 수 25411 추천 수 0

업력(業力)의 힘을 자각하자

우리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는 것일까요?
 흔히 불교를 숙명론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업(業)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말미암습니다. 때문인지 일상생활 속에서 입에 오르내리는 업은 그리 바람직하게 쓰이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저잣거리를 걷다 보면, 중년의 아주머니가 “전생에 지은 업 때문에···”하며 중얼거리는 푸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가 있습니다. 아마 뭔가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경우를 만나 체념하며 내뱉는 한탄이겠지요. 이런 사람은 업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업의 속성 중에서도 너무 숙업(宿業)쪽으로만 기운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숙업이란 지난날을 살아온 삶의 흔적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의 생활이 엄중한 업의 속박을 받는다는 말은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숙업의 당사자라고 해서, 현실로서의 숙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요?
 여기서 우리는 커다란 모순이 발생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누구나 내면적인 반성과 주체적인 자각을 하기에 고뇌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고뇌를 한다는 것은 우리 업의 속성이 숙업에 머물지 만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컴퓨터에 어떤 프로그램을 입력시키고 나면, 컴퓨터는 오로지 그 프로그램대로만 작동하지 어떤 고민도 토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컴퓨터와 사뭇 다릅니다. 이미 완성된 프로그램인 숙업이 입력되어 있는데도, 그대로를 출력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숙업의 완전성에 무릎 꿇지 않는다고 함이 옳겠지요. 이는 곧 숙업에 의해 결정 받는 것과 동시에, 그 숙업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핏 숙업이 펼쳐진 현실 속에서 숙업을 뛰어넘으려는 것이 불합리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모순된 상태가 바로 업이 작용하고 있는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즉 한편으로는 업의 움직임에 순응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부추겨 숙업을 뛰어넘는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향하며 삽니다.
 그렇기에 자기의 업은 자기만의 한계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업에는 타고난 능력과 그에 상응한 노력이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타고난 능력이란 사람이 갖고 태어난 것으로서 숙업을 말하고, 상응한 노력이란 그 능력을 온전히 발휘해서 나날이 힘을 더해가는 새로운 업[新業]을 뜻합니다.

걸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한 쪽 발이 닿으면, 다른 쪽 발은 뗍니다. 만약 걷고자 하는 사람이 한쪽 발을 떼지 않고 걷겠다고 주장한다면, 세상의 웃음을 면치 못하겠지요.
 삶은 고정된 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네 삶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새로운 업입니다. 숙업으로부터 받는 현실의 과보(果報)는 비록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엄연히 지금 생명활동을 하는 나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업을 짓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그렇다고 새로운 업을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착각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준 삶의 흔적이 숙업 즉 능력이기에, 이런 개인에게 속하는 능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아직도 드러내지 않은 능력을 드러내야 하는 의무를 세상과 자기 자신 모두에게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업을 강조하는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좀 더 업의 깊이를 가늠해 보기로 합시다.

업이란 행위(行爲)를 뜻합니다.
 그런데 행위는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 대체됩니다. 따라서 일단 모습을 드러낸 행위는 반드시 사라지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드러났던 행위가 사라진다고 해서 그것으로만 끝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해수욕장에서 바캉스를 보내던 어느 날, “오늘이 입추(立秋)다”라는 라디오방송을 듣습니다.
 이때 실제 감각으로는 폭염이 퍼붓는 날씨 속에서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면서도, 그는 이제 가을로 접어들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겁니다. 이때 입추라는 말은 시간상으로 본다면 이미 없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스크린에는 가을의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아마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언덕위에 서서, 단풍에 물든 산천의 울긋불긋한 경치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상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바리코트의 깃을 추켜올리는 착각마저 일으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 그런 법칙을 뚜렷하게 느끼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세상에 못할 짓을 한 사람이 버젓이 고개를 들고 잘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일생 동안 남에게 해코지 한 번 하지 않은 사람이 어렵사리 살기도 합니다. 이를 목격하는 사람으로선 업대로의 인생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받아들여지는가 봅니다.
 물론 이해할 만합니다. 사실 우리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원인과 결과의 성질이 다른 경우지요. 특히 나름대로는 착하게 살고 있는데도 나쁜 결과를 맞게 된다면, 누구나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겠지요. 이것이 보통사람들의 솔직한 심정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태도를 무조건 두둔한다고 우리의 모순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격적으로 자신을 점검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착한 일을 하면 마음이 즐겁습니다. 반대로 악한 일을 하면 괴로워하기 마련입니다. 이는 인지상정의 감정입니다.
 그러면 질문 하나를 던져 보기로 할까요?
 받아들이고 있는 결과로서, 즐거운 감정은 좋은 것이고 괴로운 감정은 나쁜 것인가요?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벌써 알아차렸을 겁니다. 좋고 나쁨이라는 평가는 언제나 상대적인 잣대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행여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라도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까지 겉모습만큼이나 편한지는 자신만이 알 일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눈에 띄는 현상만을 놓고 결과를 논하는 것이야 말로 공허한 짓입니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업은 끊임없이 작용하는 힘을 갖습니다. 따라서 원인에는 좋고 나쁨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상태를 흔히 무기(無記)라고 하는 데, 이를 자칫 윤리적인 방기(放棄)와 혼돈해서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지은 바대로 벌어지는 것이 인생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내가 짓는다고 하는 생각이 남아 있는 한, 그 행위의 결과를 내가 떠맡는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결과가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에 앞서서, 오늘로 이어지고 있는 업력(業力)의 엄청난 위력을 말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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