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供養하고 계십니까?
정성을 다해서 공양을 하면 언뜻 상대방이 내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자신에게 공양할 기회를 준 것이므로 오히려 감사합니다.
우리가 법당에 와서 부처님 전에 촛불 켜고, 향 사루고, 감로다를 올리고, 꽃과 과일, 그리고 음식, 이렇게 여섯 가지로 공양을 올립니다. 이것을 육법공양(六法供養)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현행원품의 다음 게송을 보면, 이렇게 등 밝히고, 향 사루고, 꽃을 올리는 등의 많은 공양으로 얻는 공덕은 잠깐 동안 닦는 법공양에 비교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숫자로도 비유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선남자여,
모든 공양 가운데 법공양이 으뜸이니,
이른 바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공양이며,
중생을 이롭게 하는 공양이며,
중생을 거두어 주는 공양이며,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는 공양이며,
선근을 부지런히 닦는 공양이며,
보살업을 버리지 않는 공양이며,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공양이다.
선남자여,
앞에 말한 많은 공양으로 얻는 공덕은
잠깐 동안 닦는 법공양의 공덕에 비한다면,
백분의 일도 되지 못하며, 천분의 일도 되지 못하며,
백천구지 나유타분의 일도, 가라분의 일도, 산분의 일도,
수분의 일도, 비유분의 일도, 우바니사타분의 일도 되지 못한다.
우리가 손님 대접할 때는 손님이 좋아하는 것을 올리게 되죠?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도 부처님이 존중히 여기는 것을 올리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법공양이 제일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공양 올리는 법공양을 올려야겠습니다. 보현행원품에서는 법공양 가운데 일곱 가지 행원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른 바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공양’이란' 불교는 기복 신앙이 아니라 수행하는 종교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려면 먼저 부처님 법문을 들어야 합니다. 지금껏 삐뚤게 살았던 내 인생을 수정하는데 부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수행(수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법회에 참석해서 법문 듣는 것은 당연하고, 예불, 독송, 염불 등의 일과를 통해서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것은 곧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나만 재수 좋고 건강하자고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요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님생명이므로 누구든 행복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무명(無明) 때문입니다. 이 몸뚱이가 나라고 할 때, 이때부터 폐쇄적으로 됩니다. 남에게 주는 게 아니라 받겠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삽니다.
내 생명의 진실, 곧 무한생명의 진실에 어둡기 때문에 얻으려 하고, 얻어지지 않으니 욕구불만으로 불행하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가 본래 무한능력의 주인공이라고 법문주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불보살님게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복이 없으니 달라고 매달려야 하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남들의 인생 문제를 내가 대신 해결해 주며, 불보살님처럼 자비의 삶을 살겠다는 발원입니다.
또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은 중생을 거두어주는 것입니다. 생명의 진실을 몰라서 헤매는 사람들의 소외감을 없애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각을 얻으신 뒤 깨침의 내용을 세상 모두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서원하시고, 250km 를 걸어서 함께 수행했던 다섯 비구를 찾아가 법문하셨습니다. 부처님이 타락했다고 먼저 등 돌리고 떠난 비구들에게 청하지 않은 벗(不請之友)으로 찾아가서 제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변에 혹시 어려운 이가 있으면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청하지 않아도 찾아가서 생명의 진실을 알려주어야 하겠습니다. 요즘 자살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데, 본래 우리가 무한능력의 주인임을 안다면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자기 능력을 비소화(卑小化)하면 상대적으로 문제가 커지기 때문에 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이라는 말은 희망과 용기와 지혜에서 비롯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런 부처님의 법문을 일러주어서 소외감, 절망감, 운명에 지배받으며 어려운 인생을 사는 이들이 모두 밝고 지혜로운 무한능력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공덕을 지어야 합니다.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는 공양이란, 저쪽의 잘못을 내가 받게 되니 얼른 보면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부처님의 큰 은혜를 입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일곱 가지 중에 세 가지는 모두 중생에게 잘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을 존중히 하시는 까닭이며,
말씀대로 행하면 많은 부처님이 출생하시는 까닭이며,
또한 보살들이 법공양을 행하면 곧 여래께 공양함을 성취하니,
이러한 수행이 참된 공양이 되는 까닭이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을 존중히 하시고 말씀대로 행하면 부처님께서 출생하신다고 합니다.
이 세상 사람은 본래가 부처님생명이므로 중생이라는 어리석은 마음이 없어지는 동시에 거기서 그대로 부처님이 출생하게 됩니다. 중생인 줄 알았다가 법공양을 받은 형제 동포가 자기 생명의 진실에 눈을 뜨게 되면 부처님이 출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공양으로 중생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라는 분이 우리와 떨어져서 따로 계신 분이 아닙니다.
남편, 아내, 부모, 자식, 동료 말고 다른 부처님이 없습니다. 가정과 직장에서는 부처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서, 절에 있는 부처님만 모신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것이며, 진정한 공양이 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보살은 위로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모든 동포를 교화합니다.
그러므로 보살이라고 하면서 주변에 부처님 법 전하기를 게을리 한다면, 이 사람을 보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보살이 이렇게 정진하여 이미 부처가 되고도 남는데 부처 되지 않는 이유는 남들 먼저 부처 되게 하겠다는 서원 때문입니다. 나는 비록 완전히 제도되지 못했더라도 남들부터 깨달음의 세계에 가게 하겠다는 것이 대승불교이며, 이 서원으로 사는 사람이 보살입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정성을 다해서 공양을 하면 언뜻 상대방이 내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자신에게 공양할 기회를 준 것이므로 오히려 감사합니다.
우리가 법당에 와서 부처님 전에 촛불 켜고, 향 사루고, 감로다를 올리고, 꽃과 과일, 그리고 음식, 이렇게 여섯 가지로 공양을 올립니다. 이것을 육법공양(六法供養)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현행원품의 다음 게송을 보면, 이렇게 등 밝히고, 향 사루고, 꽃을 올리는 등의 많은 공양으로 얻는 공덕은 잠깐 동안 닦는 법공양에 비교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숫자로도 비유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선남자여,
모든 공양 가운데 법공양이 으뜸이니,
이른 바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공양이며,
중생을 이롭게 하는 공양이며,
중생을 거두어 주는 공양이며,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는 공양이며,
선근을 부지런히 닦는 공양이며,
보살업을 버리지 않는 공양이며,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공양이다.
선남자여,
앞에 말한 많은 공양으로 얻는 공덕은
잠깐 동안 닦는 법공양의 공덕에 비한다면,
백분의 일도 되지 못하며, 천분의 일도 되지 못하며,
백천구지 나유타분의 일도, 가라분의 일도, 산분의 일도,
수분의 일도, 비유분의 일도, 우바니사타분의 일도 되지 못한다.
우리가 손님 대접할 때는 손님이 좋아하는 것을 올리게 되죠?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도 부처님이 존중히 여기는 것을 올리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법공양이 제일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공양 올리는 법공양을 올려야겠습니다. 보현행원품에서는 법공양 가운데 일곱 가지 행원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른 바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공양’이란' 불교는 기복 신앙이 아니라 수행하는 종교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려면 먼저 부처님 법문을 들어야 합니다. 지금껏 삐뚤게 살았던 내 인생을 수정하는데 부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수행(수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법회에 참석해서 법문 듣는 것은 당연하고, 예불, 독송, 염불 등의 일과를 통해서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것은 곧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나만 재수 좋고 건강하자고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요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님생명이므로 누구든 행복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무명(無明) 때문입니다. 이 몸뚱이가 나라고 할 때, 이때부터 폐쇄적으로 됩니다. 남에게 주는 게 아니라 받겠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삽니다.
내 생명의 진실, 곧 무한생명의 진실에 어둡기 때문에 얻으려 하고, 얻어지지 않으니 욕구불만으로 불행하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가 본래 무한능력의 주인공이라고 법문주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불보살님게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복이 없으니 달라고 매달려야 하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남들의 인생 문제를 내가 대신 해결해 주며, 불보살님처럼 자비의 삶을 살겠다는 발원입니다.
또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은 중생을 거두어주는 것입니다. 생명의 진실을 몰라서 헤매는 사람들의 소외감을 없애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각을 얻으신 뒤 깨침의 내용을 세상 모두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서원하시고, 250km 를 걸어서 함께 수행했던 다섯 비구를 찾아가 법문하셨습니다. 부처님이 타락했다고 먼저 등 돌리고 떠난 비구들에게 청하지 않은 벗(不請之友)으로 찾아가서 제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변에 혹시 어려운 이가 있으면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청하지 않아도 찾아가서 생명의 진실을 알려주어야 하겠습니다. 요즘 자살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데, 본래 우리가 무한능력의 주인임을 안다면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자기 능력을 비소화(卑小化)하면 상대적으로 문제가 커지기 때문에 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이라는 말은 희망과 용기와 지혜에서 비롯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런 부처님의 법문을 일러주어서 소외감, 절망감, 운명에 지배받으며 어려운 인생을 사는 이들이 모두 밝고 지혜로운 무한능력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공덕을 지어야 합니다.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는 공양이란, 저쪽의 잘못을 내가 받게 되니 얼른 보면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부처님의 큰 은혜를 입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일곱 가지 중에 세 가지는 모두 중생에게 잘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을 존중히 하시는 까닭이며,
말씀대로 행하면 많은 부처님이 출생하시는 까닭이며,
또한 보살들이 법공양을 행하면 곧 여래께 공양함을 성취하니,
이러한 수행이 참된 공양이 되는 까닭이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을 존중히 하시고 말씀대로 행하면 부처님께서 출생하신다고 합니다.
이 세상 사람은 본래가 부처님생명이므로 중생이라는 어리석은 마음이 없어지는 동시에 거기서 그대로 부처님이 출생하게 됩니다. 중생인 줄 알았다가 법공양을 받은 형제 동포가 자기 생명의 진실에 눈을 뜨게 되면 부처님이 출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공양으로 중생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라는 분이 우리와 떨어져서 따로 계신 분이 아닙니다.
남편, 아내, 부모, 자식, 동료 말고 다른 부처님이 없습니다. 가정과 직장에서는 부처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서, 절에 있는 부처님만 모신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것이며, 진정한 공양이 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보살은 위로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모든 동포를 교화합니다.
그러므로 보살이라고 하면서 주변에 부처님 법 전하기를 게을리 한다면, 이 사람을 보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보살이 이렇게 정진하여 이미 부처가 되고도 남는데 부처 되지 않는 이유는 남들 먼저 부처 되게 하겠다는 서원 때문입니다. 나는 비록 완전히 제도되지 못했더라도 남들부터 깨달음의 세계에 가게 하겠다는 것이 대승불교이며, 이 서원으로 사는 사람이 보살입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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