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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자의 마음으로 산다

문사수 2010.09.10 조회 수 29780 추천 수 0
초심자初心者의 마음으로 산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의 상태에 대해 불안감에 젖어 묻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우리 애는 문제가 있어요. 어떻게 하면 좋지요?”하는 따위의 질문 말입니다. 물론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부모는 나름대로 해결을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구에 합당한 결과는 바람직하게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녀를 애초부터 문제아(問題兒)라고 단정하고 있는 부모의 시각이 우선하고 있기 떄문입니다. 이때 내 아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판정하는 기준은 부모의 마음상태일 겁니다. 부모의 마음이 규정하는 자녀이기에, 문제아가 아닌 아이는 하나도 없게 됩니다. 이는 곧 부모가 갖고 있는 마음의 반영(反映)이 자녀의 문제로 부각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미리 조건화한 틀에 아이가 들어와야 하는데, 십중팔구는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 혼란의 와중에서 “문제야!”를 되씹을 뿐이지요. 따라서 이런 접근 방식으로는 아무런 해결책도 나오지 않습니다. 처음이 잘못되었기에 아무리 노심초사한다 하더라도 다람쥐 쳇바퀴 돌기가 됩니다.
 만약 자녀가 문제아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렇게 묻는 것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울 겁니다.
 “나는 이 아이를 어떤 사람이라고 보고 있는가?”하고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인생이란 우리 마음가짐의 반영일 뿐입니다. 인생은 변하지 않는 외적인 조건으로서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의 내용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의 인생을 펼쳐가는 주인공임을 언제 어느 곳에서나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전법(傳法)의 길을 떠나신 부처님이 ‘도나’라는 외진 곳을 지나실 때였습니다.
 그곳은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정보로 인해 부처님과 그 일행을 사이비수행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부처님 일행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반길 턱이 없었습니다. 되도록이면 빨리 그 마을을 떠났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여서 의논하니, ‘분명 부처님일행이 마을에 들리게 되면 사람은 그만두고라도 먹을 물을 찾을 것이다. 만약 물을 먹고 난다면 마을에 오래 머물 것이다.’ 이렇게 결론을 짓고는, 우물마다 겨나 풀을 집어넣어 먹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척박한 인심의 땅에 도착하신 부처님.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아난에게 분부하십니다.
 “얘야, 갈증이 나는구나. 물을 떠오너라.”
 말씀을 좇아 우물에 당도한 아난은, 한 두 곳도 아니라 모든 우물이 오염되었음을 알고 물 한 방울 뜨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올 밖에요.
 그런데 맥이 빠져 돌아온 아난을 향해 부처님은 다시 재촉하십니다.
 “얘야, 물을 떠오너라.”
 아무리 우물물이 더럽혀져 있음을 설명해도 부처님은 막무가내이십니다. 할 수 없이 터벅터벅 걸어 우물가에 도착한 아난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놀라고 맙니다. 밑에서 펑펑 솟는 물로 인해서 더러운 이물질들이 곁으로 물러나 있는 것이 아닌가요?
 물을 떠온 아난을 향해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생명도 그와 같으니라. 일시적으로는 더럽혀진 것 같지만, 항상 생성(生成)되는 것이 우리의 생명이니라.”  

 결국 영원한 흐름으로서의 나의 인생을 가둘 수 있는 힘은 세상 어디에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주변에 나타나는 사물이나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싫던 좋던 내 과거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행여 과거로 인해 오늘이 제한 받는다면, 내 생명은 그 무게를 못 이겨 자멸의 길을 걷게 될 겁니다. 마치 유럽의 기사(騎士)들 처럼 말이지요.

 유럽의 역사에 있어서 기사들의 활약은 너무나 눈부신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14세기 들어 크고 강한 활이 발명되자, 기사들의 위세가 한풀 꺾이기 시작합니다. 멀리서 날아오는 화살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기사들도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화살이 뚫지 못하도록 갑옷을 더욱 강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신체의 일부분만을 가렸는데, 점차 온몸을 감쌀 정도로 완벽한 갑옷이 발명되었습니다. 눈만 빼곡하니 보이니, 이보다 더 안전한 방어책은 없어 보였습니다.
 헌데 문제는 그 갑옷의 무게였습니다.
 보통 차려입은 갑옷의 무게만 해도 70kg에 이를 정도가 되고 보니, 자연히 기동력은 현저하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무거우니까 혼자 입지도 못하고, 웬만한 체력으로는 그냥 서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더 어이없는 것은 말을 타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막상 말에 오르지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기사가 화살의 위험으로부터는 벗어났는지는 몰라도, 전투중에 말이 화살을 맞으면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지요. 고꾸라진 기사는 단도나 도끼를 든 적군들의 너무나 손쉬운 희생물이 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인생을 단정하는 많은 말들도 종종 이렇게 기사들의 갑옷과 같이 한때의 안심감을 주곤 합니다. 사실 “사주팔자가 좋다”거나 “오늘 일진이 괜찮다” 또는 “어느 방향으로 이사 가는 게 좋다”는 식의 온갖 갑옷들이 우리의 생명을 둘러칩니다. 그래서 “자식이 출세했다” 또는 “내가 건강하니 뭘 더 바라겠는가”와 같은 복(福)이란 갑옷 속에서, 질식하듯 꽁꽁 매여 “나는 안전하다”고 태연히 지내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더 이상의 움직임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남에게 그 모습을 보이기 바쁩니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진열장의 마네킹이 아니지 않습니까? 남들에게 구경이나 시키고 있기에는 우리의 인생은 너무도 소중하며, 날마다 솟아나는 영원한 가치를 우리의 참생명은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런 인생관을 적극 권장하려는 사회풍조입니다.
 흔히 전문가(專門家)라고 불리는 말의 허구를 알아보면, 그 위험성을 감지할 수가 있는데 말입니다. 전문가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하나의 기능이나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그 전문성을 인정받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따라서 전문가는 고정된 실체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전문가가 있다고 할 때, 그도 처음부터 전문가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초심자(初心者)가 아니었던 전문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실 자신이 선택한 분야에 있어서, 막힘없는 전문가가 되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은 오늘의 전문가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사람이 전기기술자나 목수나 주부나 또는 종교인(宗敎人)이든 간에 누구나 초심자 시절을 겪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초심자였던 그 사람이 어느새 전문가 소리를 듣기 시작하면서부터 삶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달라집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려는 초심자의 겸손함이나 일에 대한 신비감은 사라집니다. 전문가집단의 속성은 그와는 반대 방향을 표출될 때가 대부분이지요. 특수한 용어나 관행을 마치 전문가만의 소유인양 내세웁니다. 보통의 초심자들은 감히 넘보지 못할 자신만의 입지를 굳히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만약 어떤 사람이 스스로를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순간, 그에게 더 이상의 발전 가능성은 없습니다. 무한생명으로 솟아나는 생명의 요구를 스스로 틀어막는 사람에게 어찌 무한한 성장이 약속되겠습니까?
자동차가 계속 구르는 것은 처음에 시동을 걸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엔진에서 연료를 분사하는 것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자동차가 구르는 한 계속되는 연료의 폭발이 있어야 그 힘으로 차가 움직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즉 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계속되는 연료의 폭발을 기대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겠지요.

우리가 인생을 산다는 것은 전문가의 조건화된 마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전문가임을 자처하는 사람에게는 사실상 더 이상의 인생은 없게 됩니다.
항상 초심자의 마음을 갖고, 다가오는 순간마다를 자신의 꿈틀거리는 생명으로 확인하는 사람만이 인생을 살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 어떤 자리에 있을지라도 초심자가 되어서 말이지요.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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