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은 타고나지 않는다
인도의 한 성인이 인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소개합니다.
“인간은 제일 먼저 생각의 씨를 뿌리고 행동을 수확한다. 행동의 씨를 뿌려서 습관을 수확한다. 습관의 씨를 뿌려서 성격을 수확한다. 성격의 씨앗을 뿌려서 운명을 수확한다.”
참으로 옳은 견해입니다. 생각은 반드시 행동을 유발하게 되어 있고, 행동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되면 습(習)이 됩니다.
이에 해당하는 예로, 저는 어린 시절 숟가락질을 배울 때 왼손잡이라서 구박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왼손잡이니까 저절로 왼손에 숟가락이 갈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옛날 어른들 생각에는 왼손을 쓰면 남들한테 놀림을 받을 거로 아셨기 때문에, 아이가 놀림거리가 되지 않도록 혼을 내셨죠. 야단맞지 않으려고, 숟가락질 할 때 왼손을 쓰면 안된다는 생각을 계속 하다보니까, 오른손 쓰는 행동을 유발하여 결과적으로 양손잡이가 되었습니다.
말투나 행동거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남자 분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거울을 보다가 "어! 왜 우리 아버지가 저기 계시지?" 하는 경험이 다들 있으실 거예요. 일반적으로 보면, 결정되어 있는 인자를 자꾸 쓰게 되어 있습니다. 자꾸 하다보니까 닮는 거예요. 사랑하면서 닮는 것도 있지만 미워하면서 닮는 것도 많아요. 사랑과 미움이라는 상대적인 평가보다도, 습(習)을 계속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대목인데요. 습을 계속 하다보니까 그것이 어느 날 자기로 등장하고, 그것을 계속 강화하기에 이릅니다.
부산에 사는 전라도 사람이 부산 말투를 많이 쓰다보면 부산 사람같이 보여요. 성격도 부산 사람 성격같이 되고요. 그렇게 부산에 오래 살다가 다시 전라도에 오게 되면 이번에는 “저 사람 경상도 사람이네.”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간단한 예를 들었지만, 이렇게 성격이라는 것은 선천적인 게 결코 아닙니다. 어떤 습을 계속하다 보니 굳어진 하나의 모습인데, 우리는 그러한 성격을 선천적이라고 착각합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그 성격을 가지고서 자신의 운명이라고까지 얘기합니다.
“나는 원래 이렇게 살게 되어있어” 라고 말이지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이처럼 나의 생각이나 행동, 습관, 성격에 내가 구속되어 있음을 진심으로 알아차릴 때, 우리는 그 너머의 세계, 즉 모든 것의 원천적인 근본 자리에 설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무한가능성의 자리에 섰을 때 새로운 습관, 새로운 성격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궁극의 의지처인 ‘서방대교주(西方大敎主)’에 모든 걸 맡겼을 때 펼쳐지는 생명의 실상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고전 중에 인색하기 짝이 없던 스크루지 영감이 ‘자신도 베풀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인식하고는, 베풂을 꺼내서 쓰니까 인자한 사람이 되는 얘기 알고 있지요?
그처럼 성격이란 게 굳어있지 않고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내 기준에서 절대격이라 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칩시다.
예를 들어 달라이라마에 대한 티베트사람들의 견해는 실로 다양합니다만, 만약에 제가 달라이라마를 직접 봤다면, 만났을 때 제 기대치보다 더할 수도 있고, 덜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만나보니까 별 볼이 없어.” 혹은 “만났는데 그분 앞에서 눈도 못 뜨겠어.”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요.
돌아가신 마더 테레사 역시, 가톨릭을 넘어서 전 세계적인 성자로 알려진 분이지만, 전 세계의 마약자금 또는 부정부패자금을 받은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기도 해요. 물론 복지사업을 위해서 필요했기 때문이겠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면 성자라고 칭송하던 사람들은 그를 두고 또 추악한 인간이라고 험담을 하겠죠? 그러나 추악할 것도 아름다울 것도 없이 그야말로 실체는 그냥 있을 뿐, 이 모든 게 나라는 사람의 잣대를 가지고 얘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상대적인 것이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한 면이 상대적으로 나타났을 뿐입니다. 상대한다고 하는 것은 나를 고정시켰을 때만 가능합니다. 나라는 사람을 고정시키면 너라는 사람을 반드시 고정시키게 됩니다. 그 너는 세상일 수 있고, 형제자매일 수도 있으며, 직장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생명도 고정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고정될 수 없듯이 본래의 생명자리는 무한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무한생명으로 그와 같이 왔다.’, ‘그와 같이 왔음을 사는 분’을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래불(如來佛)’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저기 다른 곳에 계시거나 특별한 시간에 있는 분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가는 생명자리가 부처님이라는 얘기죠. 이것을 요약하면 ‘나무아미타불’입니다. ‘나무서방대교주 무량수여래’까지 하는 부분이 ‘아미타’의 뜻이에요. 즉 아미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무한 그 자체’가 나의 생명의 진실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은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염불공양할 때 “나무서방대교주 무량수 여래불” 하지 않습니까? 이 법문을 가만히 들으세요. 상대적인 것에 의지할 수 없고, 진정으로 궁극의 세계에 의지해야겠는데 그 의지처가 무엇인가? 바로 무한생명 무한광명의 자리라. 그 자리에 서서, 그로부터 들려오는 가르침 그대로를 살아갈 때 여래불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은 새삼스럽게 되는 게 아니라, 그 생명내용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불(佛)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은 지향하는 목표가 아니라 항상하는 출발점이 되는 거지요.
스스로를 돌아볼 때 “왜 나무아미타불이 안 될까?” “왜 나무서방대교주 무량수여래불의 세계에 동의하지 못할까?”하는 생각이 든다면, ‘나’의 결론이 앞서서 상대적인 의지에 머물기 때문임을 알아차립시다.
자꾸만 상대적인 의지를 앞세우고, 상대적인 의지에 머무는 사람은 참회를 해야 합니다. ‘생각 자체가 나’이고 ‘생각이 윤회한다’고 익히 말씀드렸지요. 이것을 참회하는 겁니다. 참회한다는 것은 윤회를 이제 그만두겠다는 결단과 다르지 않습니다. 윤회를 그만두는 겁니다. 언제까지 쳇바퀴를 돌 겁니까? 참회로 윤회를 그만두니 순간마다 감사요, 가는 곳마다 감사밖에 없는 삶이 되는 겁니다. 왜? 눈앞에 벌어지는 모든 것은 무한생명의 모습이고, 무한생명을 택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앞의 말씀 속에 “인간은 생각의 씨를 뿌려 행동을 수확하고, 행동의 씨를 뿌려 습관을 수확하고, 습관의 씨앗이 내 안에서 성격으로 자리 잡히고, 성격의 씨앗이 운명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결국 운명은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는 규정된 운명이란 게 따로 없습니다. 흐를 운[運]자입니다. 부처님생명으로서, 그 어떤 모습도 선택할 수 있는 무한생명의 주인공이 바로 법우님입니다.
이제 선언합시다.
우리는 말 그대로 무량수 여래불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입니다. 아미타불로 살아갈 뿐입니다. 오직 염불(念佛)을 통해서 부처님생명으로서의 자리를 무한히 드러내며 살아갑시다.
혹시나 아직도 두려워하거나 망설이는 마음이 있다면 먼저 참회합시다. 참회함과 동시에 이제 부처님생명으로서 살아갈테니 먼저 감사합시다.
법우님과 함께 하는 날들이 오직 감사할 따름입니다. 찬탄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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