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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없는 정진과 성취

문사수 2015.08.13 조회 수 13981 추천 수 0

윤회 속에서 벌어지는 자기합리화
우린 수많은 이름을 붙여놓고는 스스로 윤회를 합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실체가 있다’라고 인정하자마자 그것이 내 삶의 주인노릇을 하기 시작합니다. 일종의 권력구도가 되는 것이죠. 정치만이 권력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권력도 무서운 권력입니다. 그 무엇인가가 권력을 갖게 되는 순간, 나를 종속시키고 나의 생명을 속박하여 윤회시킵니다.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합하면 항상 제로가 되죠.
흔히 부처님이라는 최상의 목표를 설정하고 내가 부처님이 되겠다고 할 때, 수학적인 원리에서 보면 부처님이 되겠다고 하는 플러스(+)와 중생인 나의 마이너스(-)가 만나 항상 제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감히 중생이라고 진단하는 것은 부처님을 욕되게 하는 겁니다.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됩니까? 내가 마이너스인데 부처님인 플러스를 만나서 제로가 되는 제로섬게임은 마치 농구 게임에서 골을 많이 넣겠다고 상대편 골대에 가서 계속 넣고 있을 때, 상대편도 내 골대에 가서 넣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합은 0인 제로섬게임이 되는 거죠. 이와 같은 방식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만족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생각, 즉 ‘사고의 반복을 끊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플러스적인 사고와 마이너스적인 사고를 합쳐봐야 제로밖에 되지 않는데, 그러한 윤회 속에서 인생은 항상 왜곡 당합니다.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간 적이 없어요. 나아갔다는 착각만 있는 거죠.
마치 운전할 때 엑셀을 힘껏 밟은 채 브레이크까지 같이 밟으면, 소리만 요란하고 매연만 많이 날 뿐, 앞으로는 1미터도 나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남들 보기엔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로섬이죠. 일생 진도가 안 나갑니다. 1미터도 전진하지 않은 차와 같은데도, 막상 그 사람은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이러한 윤회 속에서 벌어지는 것은 끝없는 자기합리화밖에 없지요. 그래도 나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거죠.

보고 듣는 일상도 가만히 살펴보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보고 들을 얘기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따라서 세상이 내게 어떻게 해주어야 한다는 답이 끊임없이 나를 지배합니다. 그러니 세상이 윤회하는 게 아니라 내가 윤회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이 잘못된 게 아니에요. 그 세상을 이미 규정한 내게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한 마디로 나의 생명관이 분명하지 않은 겁니다.

불교는 인천법(人天法)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람으로서 하늘의 도리에 맞춰 잘 사는 법, 즉 착하고 좋은 것을 따지는 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는 착하게 살았으니까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거라든지, 악하게 살았으니까 좋은 일 해야 한다는 것도 한가한 생각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과(因果)를 역연히 인정하고 그로부터 깨달음을 살아가는 겁니다.

과거가 없는 정진
중요한 것은 스스로 삶의 자리에서 과거에 무엇을 했다는 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과거의 무엇이든 전면수용하며, 그로부터 생명에게 기회를 주느냐의 여부입니다.
그게 뭐예요? 정진(精進)이라 그러죠.
정진에는 과거가 없다는 겁니다. 과거를 있는 그대로 결산함과 동시에 나아가는 게 정진이거든요. 그런데 흔히 정진 잘 하시다가 “정진해봐야 소용없어.” 또는 “나 옛날에 정진 많이 했어.”라는 얘기를 하곤 합니다. 이건 과거를 반복하겠다는 뜻이에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지요.
그러나 과거가 없는 것이 정진입니다.
정진은 항상 오늘의 펄떡이는 생명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불치병 환자였어요. 내가 외로운 사람이야. 돈 한 푼 없어. 사람들에게 인기도 없어. 이러한 모든 것은 현상적 잣대일 뿐, 생명에게 있어서 지금 새로움이 주어졌다는 것에 나아갈 줄 아는 거죠. 그래서 그 생명 에너지를 모아서 엑기스를 모은 것이 정(精)입니다. 나아가는 것이 진(進)이죠. 때문에 그 생명 에너지를 과감히 모아서 나아가는 것이 정진인 겁니다. 정진 속에서 결국은 뭡니까? 죽은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에, 과거는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윗줄과 아랫줄 사이의 행간을 읽으라는 소리 참 많이 하죠? 일과 일 사이, 작업과 작업 사이의 행간을 읽으라는 소리 많이 하죠. 죽은 과거와 태어나기 전 사이의 행간에 있는 것을 삶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삶은 너무나 펄떡이는 것이요, 과거나 미래의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행간의 삶이죠. 얼마나 위대합니까!

따라서 삶은 조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재력, 건강, 명예 그 어떤 것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행간 속에서 펄떡이는 삶을 미룰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정진이죠.
부처님의 가르침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자기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정직해야 됩니다. 행간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것들과 처음 만나는 경계가 벌어집니다. 되풀이 된 적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되풀이 될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부터 벌어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나는 전면 수용할 것이고, 나로부터 이어질 것에 대해서 나는 첫 발을 내딛겠다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언젠가 지방에 법문을 가려고 기차를 타려는데, 한 역에서 자살소동이 벌어져 기차가 서울역을 출발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전봇대에 올라가 자살소동을 벌인 그 사람 때문에 기차와 지하철 모두가 마비됐어요. 결국 30여분이 지연됐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일정에 차질을 빚었죠. 그야말로 인드라망을 떠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전봇대에 올라가니 제가 법문을 못가요. 그 사람이 저 법문 못 가게 한 것은 아니지만 다 연결되어 있는 거죠. 자기분노에 찬 한 사람으로 인해 여러 사람이 불편을 겪을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냐고 불평하지 말고, “아 벌어졌구나!”하고 전면 수용해야 합니다.
‘오늘 재수가 없어서...’ 혹은 ‘이 사람 안 만났으면 앞 차 타고 벌써 갔을텐데...’라고 할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마주해야 합니다. 앞서 벌어진 일은 이미 죽은 거니까요.
그 사람과 저는 어쩌면 죽을 때까지도 만날 확률이 거의 없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업 속에서 나에게 벌어진 일이니, 이미 죽은 사건에 연연해하지 말고 지금부터 벌어질 것에 대비해서 나의 생명에 기회를 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취입니다.

성취라고 하면 흔히들 언젠가 올 과거의 반복인 줄 오해하기도 합니다. 성취를 과거에 있었던 어떤 것으로 덧칠을 하다보니까, 지금의 성취를 못 누리는 딱한 분들이 참 많아요.
예를 들어, 과거에 일등을 했으니 앞으로도 일등 하는 것을 성취로 아는데, 아닙니다. 성취는 과거에 한 번도 맛보지 못한,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나에게 다가오는 생명의 무한가치입니다.
그 주인공이 누구냐? 바로 법우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맞이하는 생명의 진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과거가 없는 정진의 주인공들입니다. 때로 과거의 기억이 떠오를지라도 모든 것을 전면수용하며, 앞으로 성취할 것이 무한한 기회창출자임을 자각합시다.
이렇게 나로부터 윤회하지 않는 깨달음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 그 삶은 얼마나 당당하겠습니까?

새로운 삶의 기회가 나에게 왔구나. 정진의 기회가 왔구나. 정진에 따라서 나에겐 무한의 성취밖에 남은 게 없구나!
새삼 윤회에 끄달리지 않고, ‘나’로부터 깨어나서 모든 생명들에게 밝음을 주고, 행복을 창출할 수 있는 성취를 발원합니다. 그래서 인드라망으로 맺어진 전 세계의 모든 인연들에게 퍼져서, 우리 사회가 보다 밝아지고 맑아지는 계기가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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