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부처임을 깨치는 것
스스로를 중생이라고 여기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우리가 본래 부처였음을 깨치게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부처님가르침의 결론은 중생노릇 그만하고 부처 되라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능엄경》에서 연야달다의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점을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사위성에 연야달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잘생겼는데, 자신의 잘생긴 얼굴을 거울에 비춰볼 때마다 ‘내가 잠들어 있을 때 누가 내 머리를 베어가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니, 거울 속에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거울의 뒷면에 비추어 보았기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것인데, 당황한 연야달다는 거울을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내 얼굴이 잘생겨서 탐내던 사람들이 많더니, 지난밤에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누가 몰래 나의 머리를 베어갔구나. 빨리 내 머리를 찾아야 해!”
연야달다는 울고불고 야단이 났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네 머리는 잘 붙어 있는데, 왜 머리가 없어졌다고 하는 거냐?”라고 아무리 말해줘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머리가 없어졌다고 본 그 눈은 도대체 어디에 붙어 있으며, 머리가 없어졌다고 말하는 그 입은 도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 것이냐?”고 말해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머리를 찾아 미친 듯이 헤매다가 집에 돌아온 연야달다는 잘생긴 자신의 얼굴을 그리워하며 다시 거울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멀쩡하게 머리가 그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연야달다는 본래부터 자신의 머리가 없어진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차림으로써 비로소 머리를 되찾았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중생이라 우기며 사는 것은 마치 연야달다가 거울의 뒷면을 보고서 자신의 머리가 없어졌다고 아우성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생명가치를 외면하고 부처님께 복(福)을 달라고 비는 모습은, 머리가 멀쩡하게 붙어있는데도 머리를 찾아 이곳저곳 헤매는 연야달다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복 주세요’라고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너와 나는 똑같이 부처생명을 살고 있다. 나는 부처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쳐서 부처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고, 너는 부처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중생노릇을 하고 있는 것일 뿐, 너와 나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 부처생명을 살고 있는 것이다. 복을 주는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을 받는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 네가 부처다. 본래부터 네가 부처임을 깨치거라.”
부처님가르침의 요지는 오직 이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복 달라고 빌었더니 부처님께서 복을 주시더라고 하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지혜, 반야般若
연야달다가 자신의 머리는 본래 없어진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머리를 되찾은 것처럼 우리의 참생명이 본래 부처생명임을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깨달음이며, 이것이 ‘반야(般若)’입니다.
반야는 부처님의 지혜광명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지혜광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대적 광명이 아닙니다. 초 하나의 밝기를 일촉광(一燭光)이라 하고, 초 열 개의 밝기를 십촉이라고 합니다. 전구의 밝기를 삼십촉, 육십촉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백촉광, 천촉광, 만촉광… 그렇게 점점 밝아져서 태양광명까지 밝아졌다고 합시다. 그런데 자연계에서 가장 밝은 태양광명이라 해도 지구 전체를 밝힐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이 낮이라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메리카대륙은 밤입니다. 태양광명이 자연계에서 가장 밝다고 해도, 어딘가에는 태양광명이 미치지 못하는 음지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지혜광명은 온 우주를 두루 밝히고 어디에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으며, 아무리 먼 곳이라 해도 절대 희미해지지 않는 무한촉광의 광명입니다. 부처님의 지혜광명은 이처럼 무한촉광의 절대 광명이기에 ‘마하반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하반야의 광명으로 세계를 보면, 온 세계는 오로지 바라밀(波羅蜜)뿐입니다. 바라밀은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바라밀을 도피안(到彼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지금 살고 있는 괴로움의 이 언덕을 떠나서 괴로움이 없는 저 언덕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지혜광명으로 비춰보면 버려야 할 이 언덕도 없고, 이르러야 할 저 언덕도 없습니다. 본래부터 온 세계에 도피안이 완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하반야의 지혜광명으로 비춰보면 온 세계는 바라밀뿐이므로 ‘마하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주신 팔만 사천 가지의 법문은 그 모두가 마하반야바라밀에 관한 법문이라 할 수 있는데,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은 마하반야바라밀에 관한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가르침이기에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입니다. 경전의 수량이 많고 또한 경전의 이름들이 다양해도, 부처님가르침은 결국 ‘반야’라는 두 글자로 결론납니다.
우리들은 세상을 살면서, 고통스러워하고 남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번뇌망상이 모두 어두움인데, 이런 어두움을 없애는 것이 반야의 지혜광명입니다. 반야의 지혜광명 앞에 없어지지 않는 어두움은 있을 수 없습니다.
중생들의 어리석음이란 ‘나는 중생이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야의 지혜광명 앞에 번뇌망상이 없어져서 밝아진다는 것은, 스스로를 중생이라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사주팔자를 꼭 봐야 된다느니, 금년에는 삼재가 들어서 어떻다느니, 할아버지 산소의 위치가 잘못되어서 일이 잘 안된다느니, 이사를 잘못 가서 재수가 없다느니, 날짜를 잘못 잡아서 일을 그르쳤다느니, 이름이 좋지 않아서 사업에 실패했다느니… 하는 것들은 전부가 스스로를 중생이라 생각하는 어리석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런 어리석음은 모두 반야의 지혜광명 앞에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지혜광명을 금강반야라고도 합니다. 금강석이 부서뜨리지 못하는 물질이 없는 것처럼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물리치지 못하는 어두움은 없기에, 마하반야를 금강반야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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