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우님은 자신이 살아온 세월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모른다는 말이 솔직한 고백이 아닐까요?
가만히 따져볼라치면 왔다 갔다 하면서 온통 뒤죽박죽인 게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을 그대로 풀어내려고 해도 채 5분을 기억하질 못합니다. 그나마 특화된 어떤 사건, 예를 들자면 칭찬이나 상을 받은 경우 또는 반대로 질책이나 비난을 받은 정도는 그 윤곽이라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입학이나 졸업과 같은 굵은 마디를 형성한다고 여겨지는 날들은 제법 기억의 끈이 질긴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지나온 삶이란, 그것을 기억하고 있든 말든 지금의 시점에서 본다면 분명히 끝난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문법적으로 이르자면 완료형(完了形)입니다. 그래서 숙명(宿命)이라고 지칭됩니다. 다시 말해서 지나온 삶의 모든 축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숙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나온 삶을 온전히 수용(受容)하면 그만입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 결산하며 살 뿐입니다. 왜 이 모습으로 태어났으며, 왜 남자 또는 여자로 태어났으며, 왜 그 집안에 태어났을까?
그저 어쩌다 보니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결코 옳은 답이 아닙니다. 생명(生命)은 흐르고 흐르다가, 삶이 펼쳐지고 있는 바로 그 장소 그 시간마다 활동할 따름입니다. 생명이 택한 결과가 여기서 지금 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숙명이란 이름의 지나간 삶은 실로 좋고 나쁠 것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흔적에 지나지 않습니다. 청계천의 더러운 물이 흘러 흘러 서해바다에 이르면 맑은 물이 될 수 있습니다. 바다는 ‘너는 더러운 물의 과거가 있지 않으냐?’며 뿌리치지 않습니다. 더럽고 깨끗함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게 바다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오염된 공기와 청정한 공기가 한데 어우러져 있을 때를 허공(虛空)이라고 하듯이, 그냥 그 자체를 있는 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입니다. 지나간 과거가 부끄러우면 어떻고 자랑스러우면 또 뭐하나? 상대적인 잣대를 들이밀어 판단할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따라서 숙명은 닫혀있는 게 아닙니다. 이 몸을 갖고 태어나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과정을 모두 거친 생명의 흔적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오늘의 관점에서는 오직 무조건적인 받아들임만이 있습니다.
어떤 조건이든 생명이 그것으로 해서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상태라는 걸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좀 힘들지 모르겠지만, ‘남들은 어떤데…’ 하는 비교(比較)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은 비교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 자체로서 완전(完全)이며, 완전을 드러내는 것이 생명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은 세상에 실현해야할 이유를 갖고 태어난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다른 생명에 대한 질투가 어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다 절대생명인데, 여기에 무슨 상대적인 비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옆집을 바라보면서
“저 집은 우리 집보다 더 잘 사는구나”
하면서 부러워하거나,
“저 사람은 나보다 더 불쌍해”
하는 식의 동정을 함에 있어서, ‘더’를 염두에 둔 말이 더 이상 나올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할 지에 대하여, 진정으로 지향할 바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 사람이 은행원이든 선생님이든, 남자든 여자든 혹은 어른이든 어린아이이든 간에 생명이 자신의 완전한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서 선택한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생은 그런 면에서 창조(創造)의 연속(連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견(發見)과 동시에 창조가 일어납니다.
자신의 생명이 지나온 내력을 안다는 것은 현생(現生)에 체험해야 할 것이 그만큼 많음을 시사합니다. 알고 있다는 것은 결코 아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는 만큼 세상에 증명해야 합니다. 이는 구체적인 체득의 기회를 겪음으로써, 비로소 그 앎이 완전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눈 밝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게 없습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눈을 뜨고 본다는 것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눈을 뜨지 않고는 볼 수 없을까요?
흔히 본다고 하면 반드시 눈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안경을 끼는 까닭은 자신의 시력(視力)에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눈이라는 신체적인 조건하에서 보고 있다는 반증(反證)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자신의 수준만큼 본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같은 광경을 보면서도 각자 받아들인 만큼 봅니다.
TV연속극을 시청하는 시어머니는 시어머니의 처지를 유심히 관찰하고, 며느리는 며느리 역할에 마음이 갑니다. 선택적인 시선에 의해서 연속극을 봅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택하고 있는 인생을 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선택하고 있는 그 범주의 인생만을 알기에 그렇습니다.
이는 자신이 사는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듣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눈과 마찬가지로 육체적인 수준에서는 한계를 갖습니다. 이른바 고주파(高周波)나 저주파는 전혀 감지(感知)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린 다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들을 수 있는 영역 안에서만 듣고,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말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째려보고 있으면 ‘왜 날 욕해?’ 하고는 금방 알아챕니다. 눈을 통해서 그 소리를 듣습니다. 귀로만 듣는 것 같아도 이렇게 눈으로도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게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듣고 있는 것입니다.
낙엽 구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낙엽이 땅을 구르다가 마침내는 썩어서 생명의 대순환에 참여하고 있다는 걸 본다면, 이 사람은 생명의 소리를 듣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뱀이 허물을 벗는 것을 보며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피부가 조금만 벗겨져도 쓰려서 약을 바르고 난리인데, 뱀은 온 몸의 껍질을 벗으려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런 아픔을 견디면서 허물을 벗는 까닭은 살기 위해서이고, 또한 성장하기 위해서 아픔은 필연적입니다.
이런 현상 너머의 의미를 알아채는 사람이라면, 그는 참으로 생명의 움직임을 볼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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