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법은 누가 할까요?
구도심으로 설법을 듣고자 할 때, 우리는 누구에게 법문을 청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법을 청한다는 것은 법사님께 법을 설하여 달라고 청하는 것이겠지만, 사실은 법이란 진리이고, 진리란 본래 그대로 있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그 진리를 따로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항상 그 모습대로 있습니다. 그렇건만 우리 범부(凡夫)들은 번뇌망상(煩惱妄想)에 얽매여서 온 세계에 부처님의 진리가 충만하여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부처님과 보살님이 자비방편(慈悲方便)으로 출현하셔서 우리에게 법문을 설해주시는 것이지요.
금강경(金剛經)에서 배우는 바와 같이 모든 성현들은 무위법(無爲法)의 세계에 계십니다.
무위법을 다르게 표현하면 절대 평등(平等)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평등 세계에 계시니까 모든 부처님들이 항상 평등한 모양만 보여야 할 텐데, 그렇지 않고 갖가지의 차별(差別)된 모습을 보이십니다. 이것이 차별상(差別相)입니다.
원래 평등법의 세계에 계시지만 중생이 받아들이는 능력과 소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 능력과 소질에 맞는 법문을 해주시기 위해서 거기에 맞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서는 ‘모든 부처님께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한다’고 하십니다.
유명한 중국의 시인 소동파가 산중에서 밤에 공부하다 깨닫고 나서 새벽에 산 빛을 보면서 감탄하여 읊은 시가 있습니다.
“산 빛이 어찌 그대로 청정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의 몸이 아니겠는가?
시냇물 소리는 그대로 부처님의 설법이로구나.”
깨치기 전에 보았던 산과 깨친 뒤에 보게 된 산은 전혀 그 내용이 다르고, 깨치기 전의 시냇물 소리와 깨친 뒤의 시냇물 소리도 역시 완전히 다릅니다. 온 천지 자연 그대로가 항상 진리의 몸을 드러내 놓고 있으며, 쉬지 않고 진리를 설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깨치기 전에는 알지 못하고 지내다가 깨치게 되니까 알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량수경(無量壽經)에 ‘부처님은 우리가 법을 청하지 아니하여도 우리에게 법을 설해주시는 분[不請之友 不請之法]’이라고 나옵니다. 우리가 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부처님 쪽에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법문을 주고 계십니다. 주고 계셔도 우리가 못 알아들으니까 우리가 법을 청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깨달은 이의 안목으로는 새삼스럽게 설법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깨닫지 못한 이는 하는 수 없이 자기가 알아들을 수 있는 설법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직 미혹 속에 있는 중생들에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법을 설하는 것이 부처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께 설법을 청합니다.
그러나 역사상의 부처님께서는 이미 우리 세계에서 몸을 감추신 지 오래 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부처님께서 설해주신 경전들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의 경전을 읽으면서 그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전의 내용조차도, 어두운 우리에게는 알아듣기 힘든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부처님을 모시고 공부하신 분들로부터 법문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이익이 있을까요?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번뇌망상(煩惱妄想), 탐진치(貪瞋癡)의 마음을 없애주는 것이 법문입니다.
따라서 법문을 듣게 되면 저절로 내 마음속에 있는 탐욕을 내는 마음,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 어리석은 생각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렇게 탐진치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되어 결과적으로 지옥·아귀·축생의 삶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즉, 법(法)을 듣는다는 것이 우리 앞에 전개될 지옥·아귀·축생을 없애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법문을 듣는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생각하면 우리 모두가 본래부터 부처생명을 살고 있기 때문에, 날 불행하게 만드는 외부적인 존재가 없습니다. 나를 불행하게 할 존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새삼스럽게 나를 행복하게 해줄 존재도 밖에 있지 않습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입니다.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본래 부처생명이니까 가능성이 무한대입니다. 부처생명을 살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부처가 될 수도 있고, 또 부처생명을 살고 있는 무한능력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나를 해롭게 해서 지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무한의 가능성이 아래위로 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법문을 듣는다는 것은 무한가능성을 위로 택해서, 본래의 모습인 부처생명을 남김없이 드러내어 진리로 살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를 찾았을 때 우리는 절대 자유의 주체가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진리는 본래부터 우리들 모두의 내면에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진리는 절대 불변의 원리인 까닭에 세상의 어느 것도 진리 밖에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본래부터 진리 생명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삼스럽게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자유의 주체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러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부자유스럽다고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현재의 부자유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우리가 이미 진리 그 자체의 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 설법입니다.
설법은 이와 같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법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에게서는, 확고부동하게 있는 듯이 보이는 중생 세계를 말끔히 없애 버리게 되어 중생세계가 소멸됩니다.
일체의 속박이 사라집니다. 대립과 갈등과 다툼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일체의 외부적인 지배가 부정되고 절대 자유의 주체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마애석가여래좌상<겅주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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