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현상(現象)들은 항상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좋은 것만 항상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나쁜 것도 무상할 것입니다. 따라서 약점도 한번쯤 허용할 만하지 않습니까?
기억력이 좀 떨어지는 게 약점임과 동시에, 쓸데없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니까 장점(長點)일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글을 읽다가 아름다운 문장 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아쉽지만 필자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허용한다는 것은 꽃이 짓밟혔을 때 감도는 달콤한 향기다.”
참으로 멋진 구절 아닙니까? 허용한다는 것은, 꽃이 짓이겨질 때 그 꽃에 있던 향기가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싫은 사람이나 사건을 무턱대고 거부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허용하는 순간 도저히 억제할 수 없을 만큼 삶이 확장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조건화(條件化)된 삶을 살고 있다면, 그런 상태는 죽음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생명의 가능성을 스스로 한정(限定)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참으로 음습하고 찌뿌듯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조건화가 너무도 능한 그런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조건화를 강요하고 ‘나’ 또한 조건화된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을 무척 잘산다고 착각할 만큼 익숙하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어둠입니다. 그리고 어둠은 깨지기 마련입니다. 어둠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라져야 됩니다. ‘어둠이 항상 있다’라고 했을 때 그것이 진실이라고 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라이터 하나만 켜도 어둠은 없어질진대 어둠이 어디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두운 상태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가끔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돈을 위하여, 건강을 위하여, 부모를 위하여, 자식을 위하여 등등 온갖 상대적인 조건을 앞세우며, 그 조건의 충족을 위하여 부처님을 찾는 사람들 말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고자 한다면, 무생의 근본인 무한광명으로부터 펼쳐질 참생명의 원리를 스스로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상대적이고 물질적인 어떤 조건을 들이대면서, 그것이 ‘나’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참생명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저는 혀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는 있지만, 막상 그 말을 하고 있는 혀는 어찌된 일입니까? 자신이 부처님생명으로 살면서도 부처님생명이 없다고 주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생명이 없다는 걸 증명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하루는 선악(善惡)을 판단(判斷)하거나 시비(是非)를 분별(分別)하는 말과 행동으로 꽉 차 있다고 해도 지나치진 않습니다. 온갖 상대적인 것들에 목숨을 거는 일상사(日常事)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정(本淨)화상이라는 분이 읊으신, <선악의 두 뿌리는 참으로 있지 않다[善惡二根不實偈]>는 노래를 들어봅시다.
선(善)이 이미 마음을 따라서 나온 것일진대
악(惡)이라 한들 마음을 떠나서 있다고 하겠는가?
선악이라는 것은 밖의 인연이라 마음에는 실로 있지 않네.
악을 버린다면 어느 곳으로 보내며
선을 가지려한다면 누구로 하여금 지키게 하리오.
슬프구나, 선과 악을 보는 이여!
인연에 끌려 양쪽 귀퉁이로 달음질치누나.
홀연히 무생(無生)의 근본을 깨달으면,
비로소 전부터의 허물을 알게 되리라.
너도나도 악(惡)을 떼어내겠다고 하는데, 떼어낸 그 악은 어디로 갑니까? 본정화상이 이걸 보신 겁니다. 악을 버리겠다면 어느 곳에다 버린다는 말인가? 그리고 착한 것만을 갖고 싶다면, 그 착한 것을 누군가 보전해야 될텐데, 그러면 그 당사자는 또 누구냐? 이겁니다. 악이나 선 그리고 선악을 갖고 있거나 버리려고 하는 사람, 이 모두가 참으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일반의 대화중에 ‘거듭 난다’는 말이 많이 쓰이더군요. 새로운 자기로 태어난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듯한데, 가만히 음미해 보자면 ‘거듭 난다’는 표현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참으로 있다는 믿음체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나’는 있다, 그것도 반드시 있다는 전제로부터 ‘거듭 난다’는 사건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고 판정할만한 항상 하는 근본(根本)이 참으로 있습니까?
둘러보자면 온통 ‘나’를 주장하는 소리로 넘쳐나지만, ‘나’라고 주장할 만한 것은 갖가지의 조건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꼬리표가 붙었을 때만 ‘나’는 성립됩니다. 그리고 붙은 꼬리표를 누군가 불러줄 때만 ‘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나’는 절대적일 수 없는 상대적(相對的)인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무생(無生)의 근본이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임을 선언하는 염불법문(念佛法門)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생명으로 태어난 우리들입니다.
누구의 아들로 태어난 적도 없고, 누구의 딸로 태어난 적도 없습니다. 누구의 부인으로 태어난 적도 없고, 누구의 남편으로 태어난 적도 없습니다. 부처님생명으로 태어나서 그런 역할을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것은 현상의 생(生)이므로 항상 하지 못합니다.
근본부터 우리는 부처님생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끝없이 선악분별이나 하면서 시비를 일삼는 인생이 얼마나 한심합니까?
이것이 바로 불행(不幸)이나 불운(不運)과 같은 어둠의 정체입니다. 그런데 어둠이란 참으로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있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지적하신 무명(無明)이란, 밝지 않음을 뜻합니다. 빛이 비치니까 어둠이 없어진다는 것은, 그 어둠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있는 것이 어떻게 없어집니까? 참으로 있는 것은 도저히 없어질 리가 없습니다.
무생(無生)의 근본이란, 우리는 중생(衆生)으로 태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뜻하기에 그렇습니다.
아,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이야말로 무생의 근본이라!
약점이니, 조건화니, 선악(善惡)의 구별일랑 다 놓아두고 다만 오직 나무아미타불이라.
이렇게 염불하는 순간마다, 곳곳마다, 사람마다 부처님생명이 태어납니다.
부처님이 오신다는 뜻, 그것은 나의 참생명의 진실(眞實)임을 이제 알았습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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