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이는 세계
간혹 살다보면 자기 식의 기준에 따라 세상을 논단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막무가내로 주변에 ‘자기 식’의 잣대를 들이대며 갈등을 불러일으키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을 선뜻 나쁜 사람으로만 치부하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대개 일상(日常)에 무척이나 성실한 생활인(生活人) 그 자체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서도, “나는 정말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나한테 왜 이래?”라고 하면서 오히려 당당하기까지 한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당하는 쪽에서는 실로 어이없는 정황이지만, 그 나름의 입장에서는 자기 안목(眼目)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안목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실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자기 안목 이상의 세상이 보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내가 선택한 결과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은 생명이 드러나고 있는 과정에 대한 끊임없는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내 생명의 진정한 요구가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간다고 해도 그 삶은 무의미(無意味)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의미있는 삶을 선택한다고 할 때, 그것은 남이 대신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삶이란 어디까지나 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끝내 나로 귀결되는 생명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삶에 있어서 감히 그 어떤 존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絶對的)인 생명의 주인입니다.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삶의 온갖 표현들을 선택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는 스스로의 삶의 방식(方式)을 점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택한 삶의 현실을 느긋하게 응시하며, 삶이 지니는 궁극적인 의미를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삶에 있어서 분명한 것은 몸뚱이가 편하고 남에게 대접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행복을 보장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나’라고 보는 한 끝없이 악심(惡心)과 독심(毒心)을 정당화하게 됩니다. “내가 살자니 어쩔 수 없어.” “나에겐 먹여 살려야 되는 내 가족이 있어.” 이런 구실 아래 추구하는 탐심(貪心)에는 끝이 없습니다. 이는 ‘나’의 노력으로, ‘나’의 복으로 산다는 착각에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처럼 몸뚱이를 ‘나’라고 보는 생명관(生命觀)은 의식주(衣食住)를 추구하는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그런데 자기 삶의 의미를 끝없이 의식주를 늘려가는 데 두고 있기에, 여기에 결코 만족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자기가 누리는 재산, 권력, 건강 등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착각까지 더해져서 필경에는 무상(無常)바람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이러한 상대적(相對的)이고 유한적(有限的)인 가치들이 무상(無常)한 것임을 깨달은 때는 이미 스스로에게 배반을 당한 이후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내가 알고 보는 만큼밖에는 나에게 오지 않습니다.
행복과 불행이 이를 선택한 사람에게 삶의 내용으로 펼쳐진다는 것은 행복과 불행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은 왜 발생할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안고 있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라고 하는 제한된 입장을 설정(設定)하고 이를 내세우기 때문에 갈등과 번민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남녀(男女)의 성별(性別)이 ‘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여태까지 쌓아온 지식도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돈, 명예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단지 생명이 드러나는데 있어서 따라오는 조건일 뿐인데, 이러한 조건들을 ‘나’로 인정해버렸기에 그 결과가 괴로움이라는 것은 실로 명약관화(明若觀火)한 것입니다.
인생은 아는 만큼 보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알고 있느냐, 제대로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안다고 하는 근거가 편견(偏見)이나, 상대적이고 얄팍한 지식에 의해 규정지은 것이라면, 모르는 것보다 더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본래부터 우리의 삶은 어떤 것으로도 조건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아는 눈 밝은 선지식에게는 어떠한 조건도 최상의 조건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본래 ‘나’라고 주장할 실체는 없습니다. 하물며 ‘내 것’이라고 움켜쥘 것도 없습니다. 또한 나를 평가할 권리도 나에게는 없습니다.
이러한 스스로의 참된 생명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는 진정으로 자기가 보입니다. 또한 이것은 동시에 다른 사람의 경험을 기준으로 해서는 결코 세상을 바로 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인생은 똑같은 기준으로 잴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은 가능성 자체로만 절로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구체적으로 실감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참된 생명가치는 가감(加減) 없이 세상에 비추어져서 부처님생명의 주인공임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본래 자신의 삶을 신뢰하는 만큼 조건을 누리고 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을 밝은 거울에 비친 얼굴 보듯이 살아갈 때, 우리가 무엇을 따로 찾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오직 유일한 의무가 있다면 부처님생명으로 사는 것 밖에 없으며, 유일한 권리가 있다면 이것도 오직 부처님생명으로 사는 것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의 참된 생명가치에 대하여 유일한 권리자이자, 의무자인 것입니다.
혹시 세상이 원망스럽고 못마땅합니까?
그렇다면,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상을 선택하고 있는 자신의 안목을 먼저 점검하셔야 될 일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무릉리 마애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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