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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뀜을 아는가?

문사수 2011.02.02 조회 수 24256 추천 수 0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뀜을 아는가


다소 엉뚱할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묻겠습니다.
저 유명한 춘향전(春香傳)에 나오는 춘향이의 나이는 몇 살일까요?
답은 이팔청춘(二八靑春) 즉 열여섯일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그러면 춘향전이라고 하는 이 사설이 나온 지가 얼마나 됐을까요?
몇 백 년은 될 텐데 아직도 이팔청춘입니다. 할머니도 뭐, 한참 할머니인데 말입니다. 게다가 왜 춘향이라고 함부로 부릅니까? 춘향씨(氏)라던가, 정식 이름이 성춘향이니 성(成)양 정도는 불러줘야 되는 것 아닙니까? 함부로 불러도 춘향이가 와서 머리채 잡을 일은 없으리라는 믿음이 있어서겠지요.

뻔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아무튼 누군가를 대상화(對象化)하게 되면 발생하는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목적격(目的格)이 된 그 대상에 대해서 절대 나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일상 속의 사고(思考)가 얼마나 경직되었는가하는 예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결국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대상화하는 것과 동시에 고정화(固定化)되기 마련입니다. 적어도 그것을 관찰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삶의 진실(眞實)은 뭐란 말인가요?

세상에 많고 많은 상징(象徵)이 있지만, 우주의 근본원리를 드러내는 가장 기본 되는 구도(構圖)는 다음과 같습니다. 공간(空間)을 뜻할 때는 수평으로 옆줄을 긋습니다. 그런가하면 시간(時間)의 경우에는 수직으로 위로부터 아래까지 내려 긋습니다. 간단히 기호로 그리자면 열십자(十字) 모양이 되어, 공간의 무한성과 시간의 영원성을 뜻하는 최소 단위의 상징 구실을 합니다.

자, 그러면 말 그대로 십자 모양으로 전개되는 공간적인 무한성과 시간적인 영원성의 접점에는 과연 누가 자리하겠습니까?

두말할 나위 없이 삶을 살아가는 당사자라면, 그의 신분이나 나이나 인종이나 성별 등에 구애받지 않고 다만 참생명으로 항상 자리할 뿐입니다.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거나, 걸을 때나 심지어는 잠잘 때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참생명이 선택한 가운데 풀가동하고 있는 것이 각자의 인생입니다.

어쩔 수 없는 사주(四柱)에 의해서, 또는 조상의 묘(墓) 자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벌어지는 게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의 접점을 택한 참생명이 선택한 결과일 따름입니다.
따라서 십자 모양으로 전개되는 공간적인 무한성과 시간적인 영원성은 결정된 상태로 머물러 있을 틈도 없이 역동적(力動的)입니다. 비록 십자 모양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매 순간마다 곳곳마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엄청난 힘으로 작동할 뿐만 아니라, 무한히 움직이고 있음을 뜻합니다.

이른바 길상(吉祥) 만자(卍字)로 알려져 있는 기호가 바로 그것입니다. 십자(十字) 모양으로 전개되는 공간적인 무한성과 시간적인 영원성은 잠시도 머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역동적(力動的)으로 회전(回轉)을 합니다. 진리의 주체인 생명이 온 우주를 휘감아 움직입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휘감는 주체와 객체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다만 움직임만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생은 시간과 공간의 접점을 택한 참생명이 선택한 결과일 따름입니다. 온 우주를 휘감으면서 말입니다. 따라서 선택의 결과인 지식이나 경험 등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所有)하려고 들면, 자신의 생명가치가 왜곡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참생명의 완전함을 내어 쓰는데 게으르면, 그에 따르는 과보(果報)가 괴로움의 상태로 벌어집니다.

중국 당나라의 법운(法雲)이라는 사람은 항상 한심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대중들 가운데 유독 자기만 머리가 둔해서 놀림을 받기 일쑤였던 것입니다. 예불을 드리다가 예불문(禮佛文)을 잊어 먹질 않나, 옷을 꿰매다가는 이쪽인지 저쪽인지 모르는 식으로, 하여튼 멍청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건 몰라도 자기가 바보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습니다. 남들처럼 똑똑해지고 싶기는 한데 도통 머리가 따라가질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실스님께 상의를 드립니다.
“저는 왜 이렇게 멍청하게 태어났습니까?”
“그건 네가 지은대로 태어난 거야.”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 이것이 인생살이를 지탱하는 불변(不變)의 법칙입니다.
법운이 다시 묻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조실스님이 마침내 입을 엽니다.
“너의 전생(前生)을 이야기해 주마. 너는 지금 모르고 있지만, 너는 큰 절의 법사였다. 무척 똑똑하여 걸어 다니는 도서관과 같아서 아는 게 무척이나 많았다. 그렇지만 단 하나의 흠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법문(法門)하기를 아꼈다는 것이다. 누군가 법문해 주기를 청하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 대가(代價)를 먼저 요구하였다. 상응한 대가가 아니면, 설법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자꾸 묻는 사람을 만나서는, ‘네 머리로는 이 정도만 알면 돼’하면서 법문하기를 아꼈던 것이다.”

나눔에 조건을 달면서 아끼기 시작하면, 그는 자신의 참생명에 대해서도 인색해지게 됩니다. 갖고 있는 것을 마치 자신의 소유인 양 하는 것이 금방 버릇으로 굳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이 습(習)의 작동으로 너무나 기막힌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남한테 인색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습이 나중에는 스스로에게마저 인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법운의 전전생(前前生)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생을 살다가 목숨을 마쳤는데, 당연히 과보가 따랐겠지요? 수많은 사람에게 법문 즉 법공양(法供養)을 아끼면서, 대중들한테 이익(利益) 되게 해 준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과보(果報)로 다음 생 즉 전생에는 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절에 다니면서 법문에 갈구하던 마을사람들이 공동 관리하는 소가 되어서 마을 농사를 다 지었던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게 아니었습니다. 참생명 가치를 스스로 아꼈기 때문에, 몸이라도 때워서 그 사람들 득 되게 해주려고 소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소로 태어나서 그렇게 일생을 지내고는, 다시 사람의 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전전생에 경 줄이라도 많이 읽었던 공덕이 남았던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사람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지난 생(生)에 법문에 인색했던 습의 과보로 머리가 아둔해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경우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구나 공간적인 무한성과 시간적인 영원성의 접점마다에서 생명현상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그런 생명의 법칙을 어길 때, 그에 상응한 과보를 받는 것 또한 자신의 몫일 따름입니다. 이런 당연하면서도 확실한 진리는 선택하고 말고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저 그러할 뿐입니다.

말 그대로 공간을 광명으로 채우고, 시간을 영원으로 채우고 있는 자리가 참생명의 본래자리입니다. 그 본래자리를 이상화 시키거나 다음에 올 어떤 현상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삶 자체로 받아들이면 그만입니다. 그리하여 주변 사람들도 더불어 밝아지고, 참생명에 대한 안심감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바뀌니, 세상이 바뀌는 원리 아니겠습니까?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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