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感謝는 감사를 부른다
오늘의 불교계가 열심이긴 하지만, 뭔가 뒤틀린 풍조가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양태를 보면, ‘내가’를 앞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100일 기도를 했더니 좋더라’
‘내가 부처님을 뵈니까 환희심이 나더라’
등의 갖가지 반응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성취에 대한 측정 기준을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범주로 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설정한 목표치를 달성하게 되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반대일 경우에는 자못 사태가 심상치 않게 됩니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 보아야 소용없더라’
‘부처님의 영험이 있기는 뭐가 있어? 아예 기대도 하지 말아라’는 식의 반응까지 줄줄이 엮여 나옵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나 큰 모순(矛盾)과 만나게 됩니다.
부족함을 채우려는 신행 양태(樣態)를 당연시하려는 입장에서 본다면, 굳이 더 이상 믿음의 길로 매진한다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럼 한가지 물어봅시다.
영하(零下)의 기온일 때, 온도계에 입을 바싹대고 입김을 불면 눈금이 올라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올라간 눈금만큼 방안이 따뜻해진 것일까요? 자신이 처하고 있는 현실이 통째로 변하지 않는데, 눈앞에 보이는 계기만 올라가 보아야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실제로 체감(體感)되고 있는 춥다는 감각은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적인 추위가 더 느껴질 뿐입니다.
우리들의 신행생활이 이와 같이 춥고 배고픈 정도에 머물고만 있다면, 제아무리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따뜻한 분위기는 결코 연출되지 않습니다. 미리 설정한 잣대 앞에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항상 부족(不足)하기만 하다는 자신에 대한 규정이 있는 한, 끝없이 불안하고 언제까지나 쫓기며 살게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렇다고 소위 불자(佛子)라고 자처하는 사람의 신행생활이 쫓기는 짐승과 같은 불쌍한 처지에 머물려고만 한다면, 이보다 어이없는 상황도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살아 온 날들은 과연 그렇게 부족하기만 했을까요?
부족하다는 말에서는, ‘예전에는 만족하였는데 지금은 갖고 있지 않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깁니다. 상실한 것을 미처 채우지 못한 아쉬움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태어나면서부터 내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본래부터 있었던가요? 재산이나 권력과 같이 추상적이고 묵직한 것은 그만두고라도 우리의 몸뚱이부터가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가당치도 않을 이 몸입니다. 부모님 덕분에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아직은 완전한 답이 되지 못합니다. 세상의 음식물을 섭취해서 그 분들의 몸이 유지되었다는 것은 엄연합니다. 또한 그 음식물들도 또 다른 음식물들을 머금으며 살아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공급라인을 좇다 보면, 공급의 당사자는 세상 그 자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몸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자랑하는 지식이며 경험이라는 것의 실상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그것을 내어 쓰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이라고 주장할지언정, 이 또한 나 홀로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학교의 선생님이나 친구 그리고 매스컴 등으로 대표되는 세상으로부터 부여받아 지녀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무(無)로 태어났으나 온갖 성취로 가득 찬 게 인생의 속내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실제 상황인 것입니다. 제대로 알고 보니, 더하거나 빼거나 할 것도 없이 언제나 채워지기만 하는 날들입니다.
부족이란, 발휘해야 될 것이 엄청나게 많은데도 자신이 쓰지 않고 있었던 상태를 이르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때문에 성취란, 이미 갖고 있는 능력을 내어 쓴 데 따르는 기쁨을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얼어붙은 듯이 제 자리를 맴돌려 하는 자신에게 분노해야 합니다. 그냥 단순히 화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낭비하거나 돌아보지 않았던 지난 삶에 대해서 참으로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어찌 옛 수행자들의 자성(自省)이 오늘의 우리에게 와 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눈 깜짝이는 동안 세상은 변화하고,
태어나고 죽음은 물에 뜬 풀잎에 맺힌 이슬 같구나.
해가 가네 해가 가네 해가 다 가네.
노을진 청산에 해가 다 가네.
이 날 저 날 그럭저럭 다 보내고,
이 달 저 달 엄벙덤벙 다 보내고,
이 해 저 해 얼른얼른 지나가니,
백년 삼 만 육 천 일이 번개같이 지나가네.
이팔청춘은 어느새 멀어지고,
저승길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구나.
욕망 그물에 걸린 인생, 잘 먹고 사치한 것 너무 좋아마소.
죽음에는 노소와 귀천이 없고 인과응보 분명하다.
나날이 쫓기는 이 내 목숨 어느 누가 깨쳐줄까.
친척과 벗이 많다한들 어디 쓸데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무상(無常)하기 짝이 없네.
슬프구나 가련하구나.
금생(今生)에 이 내 몸을 제도치 못한다면,
어느 생에 사람 몸 다시 받아 제도하여 보겠는가.
이렇게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 특별한 어떤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지금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지난날을 아쉬워하거나 다가올 사건에 지레 겁먹을 새가 없습니다. 지금 결단하면 그것으로 족(足)합니다. 자신의 삶이 과거의 지나간 사건이 아니요, 앞으로 다가올 막연한 꿈도 아니라는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는 곧 부처님가르침의 참뜻이 우리의 삶이 보다 살만한 가치를 갖도록 인도하는 데 있음을 의심치 않는데서 말미암습니다. 때문에 스스로 잘못된 생각의 그림자에 가려져서 모순(矛盾)에 잠겨있음을 자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부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참생명을 구현하게 될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진실불허(眞實不虛)의 삶이 되어 완전한 성취가 언제나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感謝)를 빼놓고는 우리네 삶을 논할 자격마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 것이 아니었는데 이미 내 것으로 만들어 주었고, 앞으로도 만들어 줄 세상의 은혜를 어찌 적당히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쫓기며 전전긍긍하는 못난 모습은 우리들의 진면목이 아닙니다.
따라서 부족감에서 말미암는 것은 바른 신행생활이 아님을 명심합시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주어지는 무한한 공급이 우리의 참된 현실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얼마나 받고 있는지 아닌 지의 측정치는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닙니다. 주어진 대로 누리고 살면 그만입니다. 받을 만한 그릇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채워지기 마련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삼 알아야 합니다.
먼저 감사(感謝)합시다.
그러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감사의 사건이 따르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여러분이 다만 감사하며 사는 한 해가 되시기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런 삶으로 해서 펼쳐질 성취(成就)에 미리 두 손 모아 감사드리겠습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작년 인도구도여행 당시..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신 현장, 영취산에서 경전독송을 하는 모습...나무아미타불!
오늘의 불교계가 열심이긴 하지만, 뭔가 뒤틀린 풍조가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양태를 보면, ‘내가’를 앞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100일 기도를 했더니 좋더라’
‘내가 부처님을 뵈니까 환희심이 나더라’
등의 갖가지 반응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성취에 대한 측정 기준을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범주로 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설정한 목표치를 달성하게 되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반대일 경우에는 자못 사태가 심상치 않게 됩니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 보아야 소용없더라’
‘부처님의 영험이 있기는 뭐가 있어? 아예 기대도 하지 말아라’는 식의 반응까지 줄줄이 엮여 나옵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나 큰 모순(矛盾)과 만나게 됩니다.
부족함을 채우려는 신행 양태(樣態)를 당연시하려는 입장에서 본다면, 굳이 더 이상 믿음의 길로 매진한다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럼 한가지 물어봅시다.
영하(零下)의 기온일 때, 온도계에 입을 바싹대고 입김을 불면 눈금이 올라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올라간 눈금만큼 방안이 따뜻해진 것일까요? 자신이 처하고 있는 현실이 통째로 변하지 않는데, 눈앞에 보이는 계기만 올라가 보아야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실제로 체감(體感)되고 있는 춥다는 감각은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적인 추위가 더 느껴질 뿐입니다.
우리들의 신행생활이 이와 같이 춥고 배고픈 정도에 머물고만 있다면, 제아무리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따뜻한 분위기는 결코 연출되지 않습니다. 미리 설정한 잣대 앞에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항상 부족(不足)하기만 하다는 자신에 대한 규정이 있는 한, 끝없이 불안하고 언제까지나 쫓기며 살게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렇다고 소위 불자(佛子)라고 자처하는 사람의 신행생활이 쫓기는 짐승과 같은 불쌍한 처지에 머물려고만 한다면, 이보다 어이없는 상황도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살아 온 날들은 과연 그렇게 부족하기만 했을까요?
부족하다는 말에서는, ‘예전에는 만족하였는데 지금은 갖고 있지 않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깁니다. 상실한 것을 미처 채우지 못한 아쉬움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태어나면서부터 내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본래부터 있었던가요? 재산이나 권력과 같이 추상적이고 묵직한 것은 그만두고라도 우리의 몸뚱이부터가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가당치도 않을 이 몸입니다. 부모님 덕분에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아직은 완전한 답이 되지 못합니다. 세상의 음식물을 섭취해서 그 분들의 몸이 유지되었다는 것은 엄연합니다. 또한 그 음식물들도 또 다른 음식물들을 머금으며 살아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공급라인을 좇다 보면, 공급의 당사자는 세상 그 자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몸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자랑하는 지식이며 경험이라는 것의 실상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그것을 내어 쓰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이라고 주장할지언정, 이 또한 나 홀로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학교의 선생님이나 친구 그리고 매스컴 등으로 대표되는 세상으로부터 부여받아 지녀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무(無)로 태어났으나 온갖 성취로 가득 찬 게 인생의 속내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실제 상황인 것입니다. 제대로 알고 보니, 더하거나 빼거나 할 것도 없이 언제나 채워지기만 하는 날들입니다.
부족이란, 발휘해야 될 것이 엄청나게 많은데도 자신이 쓰지 않고 있었던 상태를 이르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때문에 성취란, 이미 갖고 있는 능력을 내어 쓴 데 따르는 기쁨을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얼어붙은 듯이 제 자리를 맴돌려 하는 자신에게 분노해야 합니다. 그냥 단순히 화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낭비하거나 돌아보지 않았던 지난 삶에 대해서 참으로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어찌 옛 수행자들의 자성(自省)이 오늘의 우리에게 와 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눈 깜짝이는 동안 세상은 변화하고,
태어나고 죽음은 물에 뜬 풀잎에 맺힌 이슬 같구나.
해가 가네 해가 가네 해가 다 가네.
노을진 청산에 해가 다 가네.
이 날 저 날 그럭저럭 다 보내고,
이 달 저 달 엄벙덤벙 다 보내고,
이 해 저 해 얼른얼른 지나가니,
백년 삼 만 육 천 일이 번개같이 지나가네.
이팔청춘은 어느새 멀어지고,
저승길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구나.
욕망 그물에 걸린 인생, 잘 먹고 사치한 것 너무 좋아마소.
죽음에는 노소와 귀천이 없고 인과응보 분명하다.
나날이 쫓기는 이 내 목숨 어느 누가 깨쳐줄까.
친척과 벗이 많다한들 어디 쓸데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무상(無常)하기 짝이 없네.
슬프구나 가련하구나.
금생(今生)에 이 내 몸을 제도치 못한다면,
어느 생에 사람 몸 다시 받아 제도하여 보겠는가.
이렇게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 특별한 어떤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지금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지난날을 아쉬워하거나 다가올 사건에 지레 겁먹을 새가 없습니다. 지금 결단하면 그것으로 족(足)합니다. 자신의 삶이 과거의 지나간 사건이 아니요, 앞으로 다가올 막연한 꿈도 아니라는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는 곧 부처님가르침의 참뜻이 우리의 삶이 보다 살만한 가치를 갖도록 인도하는 데 있음을 의심치 않는데서 말미암습니다. 때문에 스스로 잘못된 생각의 그림자에 가려져서 모순(矛盾)에 잠겨있음을 자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부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참생명을 구현하게 될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진실불허(眞實不虛)의 삶이 되어 완전한 성취가 언제나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感謝)를 빼놓고는 우리네 삶을 논할 자격마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 것이 아니었는데 이미 내 것으로 만들어 주었고, 앞으로도 만들어 줄 세상의 은혜를 어찌 적당히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쫓기며 전전긍긍하는 못난 모습은 우리들의 진면목이 아닙니다.
따라서 부족감에서 말미암는 것은 바른 신행생활이 아님을 명심합시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주어지는 무한한 공급이 우리의 참된 현실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얼마나 받고 있는지 아닌 지의 측정치는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닙니다. 주어진 대로 누리고 살면 그만입니다. 받을 만한 그릇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채워지기 마련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삼 알아야 합니다.
먼저 감사(感謝)합시다.
그러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감사의 사건이 따르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여러분이 다만 감사하며 사는 한 해가 되시기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런 삶으로 해서 펼쳐질 성취(成就)에 미리 두 손 모아 감사드리겠습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작년 인도구도여행 당시..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신 현장, 영취산에서 경전독송을 하는 모습...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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