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과 들음
 

시도 때도 없이 끓어오르는 불만으로 무척 괴롭습니다. 염불을 하면 그런 상태가 호전될까요?

문사수 2009.09.28 조회 수 5387 추천 수 0
우리의 참생명은 본래부터 무한공덕으로 자리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한마디로 공덕이란,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보편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를 자기 삶의 내용으로 발견치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공덕이 부족한 사람으로 생각될 것입니다. 하지만 참생명의 가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공덕은 아무런 인연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온갖 죄업의 당사자가 되고, 그에 따른 응분의 과보를 받아 스스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따라서 항상 무한공덕 속에 사는 은혜를 발견해야 합니다. 지금 살고 있다는 은혜, 숨 쉬고 있다는 은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사소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런 세상살이 하나 하나가 모여서 삶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염불을 하다보면, “돌아보니 조상님께, 부모님께 그리고 이웃들에게 은혜 갚는 일에 게을렀구나. 이 부끄러움을 어찌 할 것인가? 과거는 그렇다하더라도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은혜를 갚아가야겠다”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불자들은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강림하셨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솔천의 이름이 뜻하는 바를 살펴보면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 바로 소욕지족 즉 최소한의 삶에서 만족할 줄 아는 이 마음이 도솔천의 정체입니다. 단순히 검소하게 산다는 자기만족의 수준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벌어지는 삶 속에서 항상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소욕지족의 삶을 제쳐놓고 아무리 부처님을 찾으려 해도 그것은 나와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모든 인연은 부처님생명으로 대할 수 있을 때만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돈이 있거나, 어느 정도 지위에 올라야 얻어지는 안심은 진정한 안심이 아니라는 말과 같습니다. 인연 짓는 모든 모습들과 모든 관계의 연속이 다 부처님생명으로만 이어져 갈 때, 언제 어떤 상황이 닥쳐도 안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쓸데없는 걱정은 버립시다. 결코 내 나름의 정성을 다한다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염불을 통해서 은혜를 발견하는 사람의 일상은, 오직 감사로 가득합니다. 참으로 살고 있다는, 그리고 어떤 구실이나 조건보다 우선한 감사 말입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하며 감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유능한지 무능한지도 관계치 않습니다. 자식을 대하면서, 부모를 받들면서 반드시 명심해야 됩니다. 누구를 만나든, 그 또는 그녀가 다만 부처님생명으로 내 앞에 출현한 것만을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믿음으로 염불하며, 오로지 부처님생명으로 사십시오. 부처님생명으로 태어난 가운데 누리는, 무한공덕의 세계만이 우리들의 참된 세계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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