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과 들음
 

부처님은 이미 부처님이 되셨다고 하지만, 막상 갖가지의 업보에 휘둘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염불하는 우리들도 성불할 수 있을까요?

문사수 2009.09.28 조회 수 5351 추천 수 0
소위 신심이 돈독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마저 자신의 성불을 선뜻 입에 올리지 못하더군요. 마치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는 부처님과 자신의 삶을 끝없는 대립구도로 파악하는데서 말미암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성불에 자신의 삶이 포함되어 있음을 실감하지 못하는 딱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순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염불의 기본원리인 이미 부처님의 원력에 섭취(攝取)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만하면 문제는 참으로 간단합니다. 한마디로 일러, 끝없이 업보의 굴레에 싸여 윤회할 수밖에 없는 ‘나’라고 하는 허상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부처님의 원력에 섭취됨으로써 업보중생이라는 꼬리표는 아예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럼 섭취란 무엇인가?
음식을 섭취한다는 것은 단순히 음식물을 먹는 행위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이 곡물이든 채소든 씹어서 삼키는 게 목적이라면, 혀끝에서 목구멍을 통과할 때까지의 즐거움만을 추구하고 있는데 불과합니다. 그런데 몸 밖으로 배출되고 있는 배설물은 무언의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음식은 단순히 공장의 분쇄기를 거치듯 하는 물질의 의미를 뛰어넘습니다. 식사 때마다 그 안에 담긴 영양분, 더 나아가서 생명력을 공급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를 공급받는 입장에서 본다면, 살려지고 있다는 말이 가능합니다. 즉 살고 있는 표면의 모습을, 살려지고 있는 내용이 채우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런 정황을 가리켜 불가에서는 섭취된다고 이릅니다. 마치 섭취한 음식과 내 몸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쌀밥을 먹었을 때 그 영양분이 나의 생명력으로 작용하듯이 말입니다.

부처님의 원력은 우리가 입에 달고 외우는 사홍서원(四弘誓願) 가운데, “가없는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衆生無邊誓願度]”로 충분히 설명되어 질 수 있습니다. 원이 성취되어야 부처님일터인데, 부처님이란 이미 그 원을 성취하신 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성불을 믿는 한, 중생은 어디에도 따로 자리할 여지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원력에 섭취되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 원력을 벗어나서 살고 있는 별개의‘나’라는 존재를 결코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원력에 섭취되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을 부처님가르침의 상속자(相續者)라는 뜻으로 불자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불을 믿으며 염불하니, 자연히 사는 세상이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은밀한 생각으로부터 온 몸을 던지는 행동까지의 모든 삶이 부처님의 원력에 섭취될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원력의 회향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며, 회향의 때는 지금의 이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더 더욱이나 부처님의 회향이 향하는 최종 목적은 바로 우리 염불행자들이기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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