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과 들음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생활 속에서 염불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문사수 2009.09.28 조회 수 5342 추천 수 0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는 어느 가정주부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인터폰 소리가 울리면서 남편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납니다. 그러면 두말없이 반갑게 문을 열지요. 화면에 등장했던 남편은 본체만체 하면서 현관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자, 그럼 잠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과연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은 진정코 남편의 실상일까요 물론 남편이라고 의심치 않으니까 문을 열겠지만 뭔가 미심쩍습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카메라의 눈을 통해 화면에 비친 사람을 남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화면에 나타났던 남편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인터폰의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남편은 사라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자신의 눈을 통해 보이는 사람이 남편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육체를 남편이라고 한다면 어떤 부위가 남편의 실체인가? 얼굴인가? 얼굴인 듯하지만 눈이 있고 귀가 달려 있습니다. 또 팔다리를 휘젓습니다. 팔다리인 듯하지만 묵직한 몸통도 있습니다. 몸통인 듯하지만 뻣뻣한 등이 있고 불룩한 배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장도 있습니다. 심장도 있고 간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아무리 육체를 해부해 보아도 남편의 실체를 찾지 못합니다. 남편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편만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이 드러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 우리들은 육체와 같이, 참으로는 있지 않은 것을 있다고 주장하기에 바쁩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배를 불쑥 내밀면서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 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세계를 참으로 있다고 믿고 있는 한, 생사의 문제는 언제까지나 해결되지 않습니다. 제 식으로 사는 것만을 자랑하기에 다른 생명과 대립된 세계에 살게 되고, 부조화에 의한 갈등을 양산할 따름이지요. 생명을 육체로만 한정시키니 생명의 교류가 가능할 턱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흔히 말하는 바 불행의 속 내용인 것입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란 말이 생긴 이유를 알 법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 속에 갇혀 자기만을 주장하다가,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의 모든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인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만물들은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자기의 틀 속에 갇힌 사람만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지요. 세상에 죽음으로 귀결되는 생명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항상 새로운 생명이기에 남들의 대접을 누리고 있을 틈이 없습니다. 다른 생명을 구속하고 있을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상 속에서 염불한다는 것은, 자기로 모아진 유일한 생명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오로지 완전하고도 꽉 채워진 무한생명 무한광명 즉 아미타불로 살기 위해서 다만 “나무(南無)!”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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