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과 들음
 

극락이란 항상 하는 삶을 이른다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살면 그만 아닙니까?

문사수 2009.09.28 조회 수 5281 추천 수 0
이 물음은 불교의 교리를 많이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거나에 관계없이 누구나 갖고 있는 바람일 것입니다. 우리들 속마음에는 언제나 “만약 극락왕생하지 못한다면 나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 수밖에 없으리라”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로 우리네 생명은 자신의 표현을 멈추지 않습니다. 짓는 모습이나 상태가 계속 변화해 갑니다. 그러나 내가 변하고자 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삶에 대한 온전한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어릴 때에는 무척 속상하던 사건이 어른이 되어서는 흐뭇한 추억거리가 됩니다. 그런가 하면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사랑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변화의 와중에서 삶의 의미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생명은 스스로의 위대함을 묵묵히 증언할 뿐입니다. 파아란 잎새가 빽빽히 무성하고, 탐스런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을 때만이 아닙니다. 낙엽이 흩날리고 이슬이 맺히는 쓸쓸함 속에서도 그 활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봄의 들녘을 장식하는 파랗고 빨간 꽃들의 제전에 못지않은 장관이 겨울의 땅속에서도 펼쳐집니다. 산하대지가 온통 얼어붙어 있을 때라도, 가느다란 뿌리에 머무는 강인한 생명력은 거침없이 뻗어갑니다.

이는 곧 상대세계의 연장선상에 극락이 자리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삶을 생사로 나누어 놓고 좋고 나쁨을 생각거나, 영고성쇠(榮古盛衰)로 구별하며 웃고 우는 것은 자신의 참생명을 외면하는 인간의 제한된 시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사시사철의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지구라는 천체의 몫이 아닙니다. 그리고 잔뜩 흐린 날씨면 어떻고, 활짝 갠 하늘이면 또 어떠한가? 태양의 빛남에는 조금도 손상이 없습니다.

이렇게 언제나 끊이지 않는 그러면서도 어떤 상대적인 조건도 어찌 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할 위대한 우리의 생명입니다. 이는 본래부터 죽음이 없기에 새삼스레 태어남도 없는 불생불멸이며, 더할 것도 덜 것도 없이 그대로 완전하기에 부증불감이기도 한 우리의 참생명입니다.
천지간에 가득 차서 아예 죽음이 없는, 그래서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태어났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그 어떤 힘도 당신의 능력을 위축시키거나, 당신의 내일에 어둠을 드리울 여지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끝없이 소생하는 활기찬 생명활동 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참생명은 끝내 죽지 않기에, 따라서 과거에 끄달리지도 않고 미래를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나 생명은 현재진행형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적인 관점에서 나름대로 단정하고 있다면, 지금의 삶이 아무리 행복하다 하더라도 아직은 이를 극락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극락이란 상대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세계에서는 태어나서는 죽고 또 죽었다가는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행복과 불행이 얼마든지 뒤바뀌며 펼쳐집니다. 때문에 극락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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