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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業과 운명運命

문사수 2010.03.06 조회 수 28392 추천 수 0
업業과 운명運命의 차이


많은 법우님들이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과 세간에서 말하는 운명(運命)이라는 개념을 혼동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러한 업과 운명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다른지 공부해 보도록 하는 시간을 마련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어떤 것 하나도 남으로부터 강요받는 것은 없습니다. 전부 다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뿐입니다. 전생에 지은 업에 따른 인생을 살게 되는 것, 이것이 인과응보(因果應報)입니다.
반면에 운명(運命)이란 정체불명의 어떤 외부적인 존재가 내 삶에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규제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운명이란 다른 사람이 만들어준 것이기 때문에, 나의 힘으로 변경할 수 없고, 그 운명에 굴복해서 지내야 되는 타율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거기에 꼼짝없이 순종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소극적이고 피동적이며 창조성을 발휘할 수 없는 인생을 살도록 하는 것이 운명론입니다.
어떤 것이 실패하면 흔히들 ‘그건 운명이야’라고 합니다. 그 밑바탕에는 ‘나는 최선을 다해도 성공할 수가 없어. 원래 그렇게 살도록 되어있으니까…’ 하는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적인 인생을 살지 못합니다.
또한 ‘나는 사주팔자 때문에 이렇게 복 없이 삽니다’라고 하는 말속에는, 겉으로는 원망이 없는 것 같지만, 원망의 마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거기에는 자율적인 인생을 사는 것을 모두 포기하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운명론은 이렇게 해롭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경전의 곳곳에서 절대로 관상을 보거나 점을 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만약에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사람이 태어났을 때는 그러했는지 모르지만, 성장하면서 새로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계속 지어가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둑질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계속해서 도둑질을 더해서 나쁜 업을 점점 짓습니다. 또 한 사람은 똑같이 도둑질을 해왔는데, 인연에 따라 부처님 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지금까지 도둑질을 많이 하고, 거짓말을 많이 해서, 잘못된 업을 지으며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을 고쳐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에게는 과거의 악업(惡業) 때문에 앞날이 규정되어 있었던 내용들이 전부 변경됩니다. 내가 지금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서 내 앞날은 그때부터 모조리 변경되어 버리게 되므로, 과거에 예정되어 있던 프로그램과는 완전히 다른 프로그램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혹여 사주팔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낳은 순간을 보고 판단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꾸 변경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은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남이 정해줘서 내가 받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은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지은 것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아무리 분하고 억울한 일이 닥쳐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누구에게 원망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것은 내가 과거에 저질렀던 업의 결과’라고 달게 받아들여서 그때마다 반성하고 참회해야 합니다. 남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얼른 자기를 참회해서 자기를 고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달게 받는다고 하는 것은 남이 주는 것을 내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과식을 해서 소화불량이 되었다면, 나 스스로가 좋은 약을 먹는다든지 밥을 굶는다든지 해서 그것을 스스로 고쳐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오늘 운명이 나빠서 몸이 이렇게 나쁘도록 되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참고 있어야 돼’라고 하는 소극적인 태도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서 받을 업이 이미 있다는 것은, 창조적인 인생을 적극적으로 구체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 일을 받아들여서 그 순간에 전생에 지었던 모든 업을 참회하는 입장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라고 했습니다. 문제가 없으면 인생의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수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지혜밖에 없습니다.
불교는 지혜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불자(佛子)들은 나에게 부정적이고 해를 끼치게 되는 문제를 만났다고 하더라도, 부처님 법에 의지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 때문에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지혜를 계발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부정적인 견해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나쁜 운명이 나한테 온 것 같지만, 그 기회에 좋은 미래를 창조해 나갈 수 있는 자료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지었던 업이 꼭 부정적으로 나를 구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업 때문에 우리는 창조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창조성을 발휘하려면 재료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 합니다. 여섯 가지의 바라밀을 구족해야만 성불(成佛)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육바라밀의 세 번째가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인데, 이것은 ‘내가 잘났다’는 마음을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인욕바라밀을 닦지 않으면 성불할 수 없습니다. 인욕바라밀을 하는 그 현장이 바로 수도장(修道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욕바라밀을 닦으려면 내가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해야 합니다.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하지 않으면 인욕바라밀을 닦을 도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인욕바라밀을 닦을 수 있도록 나에게 와서 욕을 하고 덤비는 사람이 고마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욕바라밀을 닦을 수 있는 재료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느냐 하면 바로 과거에 내가 지은 업이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전생에 그 사람에게 악업(惡業)을 지었지만 금생(今生)에 내가 인욕바라밀을 닦으면 그때의 그 악업은 악업이 아닙니다. 나를 성장시켜주는 좋은 재료가 되는 것이지요.

인욕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보시(布施)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과거에 그 사람한테 경제적인 손실을 끼쳤다든지, 경제적으로 내가 그 사람한테 은혜를 입었다든지 하는 사람을 만나면 꼭 갚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만나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든지,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꼭 갚게 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과거에 남에게 경제적으로 피해를 입힌 업 때문에 지금 나에게서 뜯어갈 사람이 생겼다면 그것은 괴로운 현상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사람한테 과거에 경제적인 손실을 주었거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때, 불교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내 것’이라는 집착심 때문에 아까운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를 배우는 입장에서는 과거의 업을 청산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보시를 해서 번뇌망상을 제거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보시는 탐심(貪心)을 제거합니다.
우리가 보시하는 목적은 ‘모든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럴 때 남을 이익 되게 함은 물론이고 나에게도 이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부터 부처생명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 노릇을 하며 사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들끓고 있는 번뇌망상이 나로 하여금 부처생명을 살고 있으면서도 부처노릇 못하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번뇌망상 때문에 괴롭습니다. 번뇌망상에는 팔만사천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 근본을 따지면 무명(無明)에서 나오는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입니다.
이렇게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되는 탐심을 없애려면 내 욕심만 채우려고 하는 마음을 바꿔서 남에게 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보시입니다. 보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마음속에 탐심이라는 번뇌가 없어지면서, 참생명의 무한광명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운명(運命)과 업(業)은 절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주보고 관상을 보면서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스스로의 인생을 점점 더 어둡게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업이라는 것은 나한테 어떠한 현상이 오더라도 거기에서 과거를 참회하며 무한가치를 창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소극적이거나 피동적인 자세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무한가치를 창조해 나가는 순간순간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에게 아무리 어렵고 답답하고 괴롭고 억울한 일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조금도 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기회가 바로 내가 보살로서 창조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moticon

1개의 댓글

Profile
문사수
2010.03.12
運命의 奴隸냐 創造的인 業의 主人公이냐, 그것이 문제군요.
법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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