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듣기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문사수 2010.03.01 조회 수 30120 추천 수 0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무언가를 바라고 있지만, 실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무엇이 행복인지도 모르는 채, 막연하게 의식주가 풍부하다든지, 사회적 지위나 명예가 높아지는 것들을 행복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들을 얻으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아함경(阿含經)에 나오는 부인 넷을 둔 남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매우 큽니다.

어떤 남자가 부인 넷을 두고 살았습니다.
첫째 부인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거의 보살펴 주지 못했고, 둘째 부인은 그런 대로 보살펴 주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처지였으나 셋째 부인이나 넷째 부인에게 쏟는 애정에는 비교가 되지 못했습니다. 셋째 부인은 남들과 다투기까지 해서 얻은 아내인데, 그렇기 때문에 셋째 부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거리였으므로 정성을 다해 셋째 부인을 보살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셋째 부인이라 해도 넷째 부인만큼은 못했습니다. 넷째 부인의 요구는 그 어떤 것이라도 거절하지 않고 지극한 정성을 기울여서 보살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남자가 살고 있던 도성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아무 것도 가진 것 하나 없이 도성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무일푼으로 떠나게 된 남자는 제일 먼저 넷째 부인을 찾아갔습니다.
 “내가 이제 여기를 떠나게 되었는데, 당신과 제일 가까이 지냈으니 당신이 나와 같이 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무슨 소리예요? 큰소리치면서 살 때나 남편이지… 이제 거지가 된 판에 어떻게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당신과 같이 갈 수 없어요.”
  이렇게 넷째 부인에게 배신을 당한 남자는 셋째 부인에게도 가서 이야기해 보았지만, 마찬가지로 배신을 당했습니다.
 “당신이 가장 애지중지하던 넷째 부인도 같이 안 간다고 하는데, 내가 왜 당신과 같이 가야 합니까?”
  둘째 부인에게도 가서 이야기해 보았지만,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같이 산 정(情)이 있으니 동구 밖까지는 배웅해 드리겠지만, 당신과 같이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 골방에 가 보니까 웬 노파가 쭈그리고 앉아서 주섬주섬 걸레를 모으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동안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몰랐던 첫째 부인이었습니다.
  “뭘 그리 모으고 있소?”
  “이야기를 듣자니까, 당신이 가진 것 하나 없이 쫓겨나게 되었다는데, 내가 당신을 모시고 가야지요. 하지만 당신이 그 동안 나에게 준 것이 없으니 걸레쪼가리라도 모아야 되겠기에 이렇게 모으고 있습니다.”
  그 남자는 둘째, 셋째, 넷째 부인이 인생의 보람이며 행복인 줄 알고 살았지만, 이런 상황에 이르러 보니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다 헛일이었구나… 진작 첫째 부인에게 정성을 기울이고 잘 보살펴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후회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와서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넷째 부인은 우리들의 육신을 말합니다. 우리는 육신이 건강하고 오래 살면 그 이상 바랄 게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몸뚱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안 들어주는 것이 없습니다. 배고프면 얼른 먹여주고, 추우면 얼른 따뜻한 방에 들어가 이불 속에 몸을 눕힙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몸뚱이의 요구사항은 점점 많아지는데, 결국은 그것들을 하나도 거절하지 못하고 평생을 몸뚱이 뒷바라지하기 바쁩니다. 이것이 행복인 줄로 속고 사는 인생살이입니다.
  셋째 부인은 남들과 다투기까지 해서 얻은 부인이므로 재산이니, 권력이니, 지위니, 명예니 하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남들과 경쟁해서 쟁취한 것이니 만큼 그 만족감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들이 지니지 못한 재산과 권력을 가지고, 남들보다 높은 지위를 누리고, 남들의 존경을 받으면, 이런 것을 행복한 인생으로 알고 지냅니다.
  둘째 부인은 가족이니 친척이니 하는 권속이나 친구를 의미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지기 싫지만, 죽어서까지 같이 갈 수는 없습니다. 죽으면 화장장이나 묘지까지는 따라가서 울며 배웅해 주지만, 장례를 치른 후에는 각자 살아가는 일에 몰두할 따름입니다. 따라서 권속이나 친구가 많이 있다고 하는 것도 완전한 의미의 행복을 보장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 첫째 부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몸뚱이를 버리게 되더라도 끝까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마음자리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참으로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지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살아가다가, 목숨을 마칠 적에 마음에는 걸레밖에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이야기 속의 남자처럼 이렇게 인생을 산다면 우리에게 무슨 행복이 보장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돈이나 명예를 가지고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참 나를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참생명이 뭔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임시로 가지고 있는 육신이 자기인 줄 착각하고, 육신의 요구가 충족되면 행복한 것으로 아는 인생을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이 배신할 적에 아무 데도 의지할 곳 없는 결과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의 문을 연다고 할 때, 생사(生死)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이 행복의 문을 여는 첫째 단계입니다.
  법회가 있는 날 법당에 모여서 법문을 듣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행복의 문의 손잡이를 잡은 것이 됩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모시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셨을 때 비로소 행복의 문을 연 것이 됩니다.
 
 종교(宗敎)란 ‘생명의 중심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금강경을 공부해나가다 보면 ‘부처님이 오셨다거나 가셨다거나 누웠다거나 앉았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여래의 설하신 바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오셨다’ ‘가셨다’하는 공간적인 이동을 하신다면, 그런 부처님은 상대세계에 계신 분이지 절대세계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절대(絶對)란 ‘대립과 적대세력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상대유한세계가 다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상대유한세계가 없어진 세계를 절대무한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절대무한이기 때문에, 오시는 분도 아니고, 가시는 분도 아닙니다.
본래 계신 분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생명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생명의 참모습을 알게 되므로, 진정 부처님 가르침에 의해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몸뚱이를 내 생명으로 알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몸뚱이가 나라고 하면 태어난 날이 있고 죽을 날이 있으니 유한생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몸뚱이는 물질이기 때문에, 물질이 곧 나라는 물질적인 생명관을 갖게 됩니다. 물질이 생명일 수는 없는 것인데도 물질을 생명인 줄 알고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물질적인 감각을 만족시키며 살면 그것이 행복인 줄 알고 삽니다. 때문에 마침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어리석음을 타파해 주십니다.
  “너희들의 참생명은 결코 육신이 아니야. 너희들의 참생명은 육신이 생겨날 때 비로소 생겨난 것도 아니고, 육신이 없어질 때 없어지는 것도 아니야[不生不滅]. 새삼스럽게 태어난 것도 없고, 죽을 것도 없는 영원절대생명, 그것이 너희들의 참생명이야.”라고 말입니다.

  우리들의 육신을 자동차에 비유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가 잘 달립니다. 겉보기에는 자동차가 스스로의 힘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동차 자체에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운전자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운전자가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니다가 더 이상 쓸 수가 없다고 판단되면 폐차장에 내버립니다. 자동차가 폐차장에서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운전자가 같이 죽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가 폐차장에 버려지면, 운전자는 그 자동차에서 내려 새로운 자동차를 타고 갑니다.

  우리들의 참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연이 다 되어서 육신을 버리게 되더라도, 참생명이 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참생명은 본래부터 영원절대생명입니다. 이렇게 영원절대생명을 살고 있다는 생명관이 확립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내 생명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나의 참생명은 이 육신이 생겨날 때 생겨난 것도 아니고, 육신이 없어질 때 사라지는 것도 아닌 절대무한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우리는 참인간으로서 살게 됩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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