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법회와의 인연을 찬탄드립니다. 절에 다니면서 삶에 도움이 되셨다니 감사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절’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할 것 같습니다.
절이란 말 속에는 참 다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분명 공간을 지칭하는 말만은 아닐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절은 ‘스님들 기숙사’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절이 절일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당연히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 절이라 한다면 박물관도 절이라 해야겠지요.
두 번째는 수행자들이 모여서 정진하는 곳이어야 할 것입니다. 수행자들의 숙박시설이어서는 안됩니다. 간혹 문화재로 지정된 소위 관광사찰에 가보면 ‘외인 출입금지’라는 경고문이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정진 중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뜻인 줄 알면서도 마음 한켠에 씁쓸함이 감돕니다.
왜 일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법우님의 질문 내용에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절이란 삶의 무게로 지친 자에게 휴식이 되고, 두렵고 위축된 이에게 힘이 되고, 길 잃은 자에게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는 원초적(?) 기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 번째로, 절에는 ‘법회(法會)’가 열려야 절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이 베풀어져서 사람들로 하여금 절대 안심(安心)의 세계에 살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절의 기능일 것입니다. 그러나 소위 관광사찰에 가보면 수행자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이고 그 흔한 전법전단지 하나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반기는 것은 법당에 터줏대감처럼 앉아서 기와를 판매하는(?) 사람뿐입니다. 단순히 건물이나 불상 구경이나 하고 가도록 하는, 말 그대로 관광사찰은 절이 아닙니다.
얘기가 딴 대로 흐른 듯하지만, 불교가 일반대중에게 외면당하고 심지어 왜곡되는 현상은 불교도가 지은 업(業)의 인과(因果)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법우님께서 질문하신 업이란, 우주의 보편적인 법칙성 즉 인과법(因果法 :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다) 속에서 작동하고 축적된 생명현상을 말합니다. 장황한 교리적 해설보다는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이 업이다’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될 것입니다. 이처럼 간결하고 명백한 진리를 바탕으로 불법은 설해지고, 우리네 삶을 냉철하게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가 업이 되니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외나무다리 건너듯이, 멈추지 말고 정성스럽게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를 정진(精進)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공부입니다. 내 삶과 조금도 괴리되지 않는 가르침이 불교이기 때문입니다.
불법을 만나서 자신의 삶이 향상(向上)의 길을 걷는 것은 굉장히 큰 행운입니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업의 인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귀한 인연을 만났으니 뒤돌아보지 말고 부지런히 ‘좋은 업[선업(善業)]’을 지어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좋은 업을 짓는 데에 지치거나 싫증 내지 않을 수 있는 수행이 바로 ‘염불(念佛)’입니다. 부처님을 늘 생각하며, 그 가르침을 잊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선 법우님께서는 가까운 문사수법회 지역법당에 개설된 법회에 동참하시는 것이 순서이겠습니다. 그곳에서 인례를 받으시고 법문을 자꾸 자꾸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인연으로 불법이 충만(充滿)함을 알게 되고, 모든 의문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그 인연으로 인해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삶도 더불어 편안해질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절이란 말 속에는 참 다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분명 공간을 지칭하는 말만은 아닐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절은 ‘스님들 기숙사’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절이 절일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당연히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 절이라 한다면 박물관도 절이라 해야겠지요.
두 번째는 수행자들이 모여서 정진하는 곳이어야 할 것입니다. 수행자들의 숙박시설이어서는 안됩니다. 간혹 문화재로 지정된 소위 관광사찰에 가보면 ‘외인 출입금지’라는 경고문이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정진 중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뜻인 줄 알면서도 마음 한켠에 씁쓸함이 감돕니다.
왜 일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법우님의 질문 내용에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절이란 삶의 무게로 지친 자에게 휴식이 되고, 두렵고 위축된 이에게 힘이 되고, 길 잃은 자에게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는 원초적(?) 기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 번째로, 절에는 ‘법회(法會)’가 열려야 절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이 베풀어져서 사람들로 하여금 절대 안심(安心)의 세계에 살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절의 기능일 것입니다. 그러나 소위 관광사찰에 가보면 수행자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이고 그 흔한 전법전단지 하나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반기는 것은 법당에 터줏대감처럼 앉아서 기와를 판매하는(?) 사람뿐입니다. 단순히 건물이나 불상 구경이나 하고 가도록 하는, 말 그대로 관광사찰은 절이 아닙니다.
얘기가 딴 대로 흐른 듯하지만, 불교가 일반대중에게 외면당하고 심지어 왜곡되는 현상은 불교도가 지은 업(業)의 인과(因果)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법우님께서 질문하신 업이란, 우주의 보편적인 법칙성 즉 인과법(因果法 :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다) 속에서 작동하고 축적된 생명현상을 말합니다. 장황한 교리적 해설보다는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이 업이다’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될 것입니다. 이처럼 간결하고 명백한 진리를 바탕으로 불법은 설해지고, 우리네 삶을 냉철하게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가 업이 되니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외나무다리 건너듯이, 멈추지 말고 정성스럽게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를 정진(精進)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공부입니다. 내 삶과 조금도 괴리되지 않는 가르침이 불교이기 때문입니다.
불법을 만나서 자신의 삶이 향상(向上)의 길을 걷는 것은 굉장히 큰 행운입니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업의 인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귀한 인연을 만났으니 뒤돌아보지 말고 부지런히 ‘좋은 업[선업(善業)]’을 지어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좋은 업을 짓는 데에 지치거나 싫증 내지 않을 수 있는 수행이 바로 ‘염불(念佛)’입니다. 부처님을 늘 생각하며, 그 가르침을 잊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선 법우님께서는 가까운 문사수법회 지역법당에 개설된 법회에 동참하시는 것이 순서이겠습니다. 그곳에서 인례를 받으시고 법문을 자꾸 자꾸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인연으로 불법이 충만(充滿)함을 알게 되고, 모든 의문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그 인연으로 인해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삶도 더불어 편안해질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시행
2021.06.02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