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問]
법우들과 함께 가행정진을 모신 이후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금강경 1독, 108배 정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서둘러서 끝내고 또 어떤 때는 잡념이 가득한 채 정진을 모시게 됩니다. 그리고 또 어떤 때는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는 찬탄을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 자세로 하는 정진도 정진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하여 자책하기도 합니다.
법사님! 정진은 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잘 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정진을 모시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答]
법우님께선 지금의 정진을 만족치 못하고 있지만 나름대로 진솔한 정진을 진행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지금까지 모시고 있는 정진행을 중단하지 마시고 용기를 내어서 흔들림 없이 실천하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다만 법우님의 원만한 정진의 성취를 위해 몇 가지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참고하시어 발전 있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언제나 불편함 없이 자유롭고 복된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 행복의 추구는 오직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번뇌라는 파노라마 속에서 이미 충만 되어 있었던 것임을 살아가는 동안 스스로 발견해야 될 몫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눈과 비의 피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언제나 적당한 일조량에 청량한 미풍이 불어오는 쾌적한 환경을 꿈꾸지만 실재로 그런 환경 속에선 어느 누구도 쉽게 살수 없는 황량한 사막지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까닭에 오늘 우리는 눈이 오면 수고스러움을 감내하며 설경을 즐기며, 비가 오면 불편을 감수하며 빗소리에 근심을 달래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우리가 지금 이순간의 삶을 여유로움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수많은 근심과 수고스러움을 감내했을 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평화와 자유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인생이란 그러한 환경과 삶 속에서 굴하지 않고 적응하며 열심히 살아가고자 노력해야 만이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정진의 경우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정진은 참생명을 자각한 구도자에겐 진리를 향한 진한 삶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진(精進:Virya)은 사전적 의미로는 꿋꿋하고 바르게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행을 닦고, 악행을 하지 않고, 잡념을 버리고, 게으름 피우지 않고 불도(佛道)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육바라밀 중의 하나인 정진은 언제나 몸과 입으로써 남을 비방하지 않고, 항상 진리에 머물러 생각을 삿되지 않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정진행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원인은 욕심에서 일어난다고 설하십니다. 범부는 욕심에 사로잡혔기에 들끓는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르게 나아간다는 것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정진은 정진만으로 그 목적이 원만히 성취되어질 수 없습니다. 정진행이 원만히 구족되어지기 위해선 먼저 인욕이 함께 실천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욕과 정진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대지도론」에서는 “인욕심(忍辱心)이 굳으면 정진의 궁력(弓力)은 강하고 지혜의 화살 또한 예리하여 교만이라고 하는 온갖 적을 무찌를 수 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살이의 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가장 실다운 생활의 지혜(智慧)를 얻어야 하는 것처럼 우주만유의 이치를 터득하는 것도 지혜의 힘이 아니면 안 되며, 부처님의 교법을 닦아 세간에 널리 펴기 위해서도 지혜가 없으면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올린 공들인 탑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지혜의 예리한 화살을 얻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정진이라는 이름의 궁력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정진의 힘은 오로지 인욕심이 함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정진은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임을 믿는 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모시는 수행입니다. 정진의 마음에 혹시나 조건을 앞세워서 실행한다면 그것은 지체 없이 장애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들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재산을 위해서 등의 어떤 조건을 앞세워서 정진을 하게 된다면 얼마가지 않아서 해태심과 또 다른 번민으로 괴로움을 맞이하게 됩니다. 정진할수록 점점 반대로 조건들이 자꾸만 앞섭니다. 그래서 예기치 못한 번뇌로 또 다른 괴로움을 맞이합니다.
또한 정진 중에 잡념과 장애가 생기게 된다하여도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다만 지난날 중생생명에 대한 착각과 집착으로 인하여 익혔던 업력에 의해서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에 대한 지혜가 밝지 않아서 오는 갈등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다 근원적 차원에서 살펴보면 지금 거처하고 있는 번뇌와 장애는 어떤 의미로든지 정진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살고 있거나, 혹은 조금 밝은 곳에서 지낼 때는 지금 그 자리가 온갖 먼지가 충만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밖에서 한줄기 강한 빛줄기가 비춰지게 되면 자신의 주위가 먼지가 어지러이 떠다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참생명에 대한 법문을 듣지 않고 정진도 하지 않는다면 격지 않아도 될 번뇌와 장애가 법문을 듣고 정진을 모시게 됨으로 자각증세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진 중에 만나게 되는 번뇌와 장애는 버려야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정진 중에 부처님의 지혜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작용하고 있는 가피임을 깨닫고 감사의 마음으로 마주해야 하는 존재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번뇌와 장애를 거처하지 않고 중생생명이라는 끈끈한 집착심을 떨쳐버릴 방법은 없습니다. 굳이 장애를 찾을 일도 아니지만 장애가 온다고 고민하고 포기할 일은 더더욱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큰 스님과 제자의 대화를 소개하면서 맺을까 합니다.
“어떤 일로 내게 왔느냐?” “스님 지금 저는 많이 괴롭습니다.”
큰스님은 제자의 손을 덥석 잡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너도 그러냐 나도 그렇구나!” “…?”
“넌 지금까지 괴로울 때 어떻게 하며 지내 왔느냐?”
“다만 오직 부처님 전에 나아가 염불 정진을 했습니다!”
큰 스님은 지긋이 미소를 지으시며,
“너에게 다가오는 문제와 번뇌가 있었기에
언제나 부처님을 잊지 않고 찾을 수 있으니 어찌 고맙지 않느냐!”
나무아미타불!
<답변_명성법사>
법우들과 함께 가행정진을 모신 이후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금강경 1독, 108배 정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서둘러서 끝내고 또 어떤 때는 잡념이 가득한 채 정진을 모시게 됩니다. 그리고 또 어떤 때는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는 찬탄을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 자세로 하는 정진도 정진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하여 자책하기도 합니다.
법사님! 정진은 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잘 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정진을 모시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答]
법우님께선 지금의 정진을 만족치 못하고 있지만 나름대로 진솔한 정진을 진행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지금까지 모시고 있는 정진행을 중단하지 마시고 용기를 내어서 흔들림 없이 실천하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다만 법우님의 원만한 정진의 성취를 위해 몇 가지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참고하시어 발전 있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언제나 불편함 없이 자유롭고 복된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 행복의 추구는 오직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번뇌라는 파노라마 속에서 이미 충만 되어 있었던 것임을 살아가는 동안 스스로 발견해야 될 몫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눈과 비의 피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언제나 적당한 일조량에 청량한 미풍이 불어오는 쾌적한 환경을 꿈꾸지만 실재로 그런 환경 속에선 어느 누구도 쉽게 살수 없는 황량한 사막지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까닭에 오늘 우리는 눈이 오면 수고스러움을 감내하며 설경을 즐기며, 비가 오면 불편을 감수하며 빗소리에 근심을 달래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우리가 지금 이순간의 삶을 여유로움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수많은 근심과 수고스러움을 감내했을 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평화와 자유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인생이란 그러한 환경과 삶 속에서 굴하지 않고 적응하며 열심히 살아가고자 노력해야 만이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정진의 경우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정진은 참생명을 자각한 구도자에겐 진리를 향한 진한 삶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진(精進:Virya)은 사전적 의미로는 꿋꿋하고 바르게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행을 닦고, 악행을 하지 않고, 잡념을 버리고, 게으름 피우지 않고 불도(佛道)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육바라밀 중의 하나인 정진은 언제나 몸과 입으로써 남을 비방하지 않고, 항상 진리에 머물러 생각을 삿되지 않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정진행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원인은 욕심에서 일어난다고 설하십니다. 범부는 욕심에 사로잡혔기에 들끓는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르게 나아간다는 것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정진은 정진만으로 그 목적이 원만히 성취되어질 수 없습니다. 정진행이 원만히 구족되어지기 위해선 먼저 인욕이 함께 실천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욕과 정진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대지도론」에서는 “인욕심(忍辱心)이 굳으면 정진의 궁력(弓力)은 강하고 지혜의 화살 또한 예리하여 교만이라고 하는 온갖 적을 무찌를 수 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살이의 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가장 실다운 생활의 지혜(智慧)를 얻어야 하는 것처럼 우주만유의 이치를 터득하는 것도 지혜의 힘이 아니면 안 되며, 부처님의 교법을 닦아 세간에 널리 펴기 위해서도 지혜가 없으면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올린 공들인 탑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지혜의 예리한 화살을 얻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정진이라는 이름의 궁력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정진의 힘은 오로지 인욕심이 함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정진은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임을 믿는 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모시는 수행입니다. 정진의 마음에 혹시나 조건을 앞세워서 실행한다면 그것은 지체 없이 장애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들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재산을 위해서 등의 어떤 조건을 앞세워서 정진을 하게 된다면 얼마가지 않아서 해태심과 또 다른 번민으로 괴로움을 맞이하게 됩니다. 정진할수록 점점 반대로 조건들이 자꾸만 앞섭니다. 그래서 예기치 못한 번뇌로 또 다른 괴로움을 맞이합니다.
또한 정진 중에 잡념과 장애가 생기게 된다하여도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다만 지난날 중생생명에 대한 착각과 집착으로 인하여 익혔던 업력에 의해서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에 대한 지혜가 밝지 않아서 오는 갈등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다 근원적 차원에서 살펴보면 지금 거처하고 있는 번뇌와 장애는 어떤 의미로든지 정진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살고 있거나, 혹은 조금 밝은 곳에서 지낼 때는 지금 그 자리가 온갖 먼지가 충만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밖에서 한줄기 강한 빛줄기가 비춰지게 되면 자신의 주위가 먼지가 어지러이 떠다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참생명에 대한 법문을 듣지 않고 정진도 하지 않는다면 격지 않아도 될 번뇌와 장애가 법문을 듣고 정진을 모시게 됨으로 자각증세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진 중에 만나게 되는 번뇌와 장애는 버려야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정진 중에 부처님의 지혜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작용하고 있는 가피임을 깨닫고 감사의 마음으로 마주해야 하는 존재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번뇌와 장애를 거처하지 않고 중생생명이라는 끈끈한 집착심을 떨쳐버릴 방법은 없습니다. 굳이 장애를 찾을 일도 아니지만 장애가 온다고 고민하고 포기할 일은 더더욱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큰 스님과 제자의 대화를 소개하면서 맺을까 합니다.
“어떤 일로 내게 왔느냐?” “스님 지금 저는 많이 괴롭습니다.”
큰스님은 제자의 손을 덥석 잡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너도 그러냐 나도 그렇구나!” “…?”
“넌 지금까지 괴로울 때 어떻게 하며 지내 왔느냐?”
“다만 오직 부처님 전에 나아가 염불 정진을 했습니다!”
큰 스님은 지긋이 미소를 지으시며,
“너에게 다가오는 문제와 번뇌가 있었기에
언제나 부처님을 잊지 않고 찾을 수 있으니 어찌 고맙지 않느냐!”
나무아미타불!
<답변_명성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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