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問] 부처님을 삶의 원천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말과 같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사시던 당시와 오늘의 역사적인 상황은 사뭇 다르지 않은가요?
역사성이란 것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것은 사실입니다. 시대에 상응한 삶의 갖가지 모습이 당시의 역사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의 수준에서도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항상 현재적인 시점에서 출발하면서도, 과거를 언제든지 그럴 듯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역사성의 함정이기도 합니다.
몇 가지의 단편적인 기록이나 유물은 이미 현재를 사는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추론(推論)만으로 역사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의 거울을 끝없이 닦습니다.
이끼가 끼고 색이 바랬다고 하지만, 그 또한 당시 사람들로서는 분명 현재의 삶이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머무는 데 따라, 똑같은 역사라도 그 해석은 얼마든지 춤출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역적으로 알고 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충신으로 평가받기 시작하기도 하고, 무능한 사람이 유능한 사람으로, 유능한 사람이 무능한 사람으로 자리바뀜을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굴욕의 역사가 민족의 저력을 증명하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나름대로의 역사성으로 포장된 주장은 불교 또는 부처님을 대하는데 있어서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불교를 과거 한 때의 해프닝 정도로 치부하려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현재의 가치기준을 앞세워, 마치 용도폐기된 상품과 같은 취급을 하려고도 합니다.
또한 겁(劫)과 같은 시간관념을 예로 들어서, 불교를 비역사적이라든가 신화화된 역사일 뿐이라고 단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당연합니다. 부처님으로 표상화된 불교가 때와 곳을 따라 다르다면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만이 진리입니다. 즉 공간적인 타당성과 시간적인 보편성은 진리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예외가 인정된다면 감히 진리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불변(不變)의 진리를 발견하신 분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셨다고 하는 것은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마음을 잡지 못합니다. 현재의 마음도 붙들지 못합니다. 미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흐르는 마음을 쫓기 보다는 흐름 자체로 사는 것이 본래의 인생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부처님의 세계는 우리들의 생각을 기준으로 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인정합니다. 3000년 전의 역사적인 인물로서만이 아닙니다. 삶을 일궈가면서 문제가 발생하는 한, 부처님은 언제나 삶의 중심에 섭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세상에 몸을 나투셨던 때를 살던 사람들이나 지금의 우리들이나 괴로워 한다는 상태는 변함이 없습니다. 때문에 인간에게 문제가 있는 한, 그리고 괴로움이 끊이지 않는 한 앞으로 3000년 후도 부처님은 오늘의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작위적으로나 인위적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역사의 산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몇 년이든 날마다 오늘입니다. 이 오늘에 눈을 뜨고 부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問] 그러면 부처님이 사시는 세계는 우리의 삶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입니까?
언제 어느 곳에서나 우리에게 다가오는 분이 부처님입니다. 아니 원래부터 와계셨습니다. 아직도 말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부처님으로 살게 되었지만 스스로 그것에 눈을 감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같은 분이지만 각자가 맞이하는 부처님은 다를 수 있습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보십시오. 별빛은 항상 했지만 바라보기 전까지는 아직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별빛의 밝음은 오로지 나에게 도달한 밝음일 뿐입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나를 향해 빛나는 빛인 것입니다.
법우님은 지월(指月)의 비유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밤하늘에 뜬 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그런데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을 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상대적인 지식이나 경험의 세계가 손가락이라면, 달은 상대가 끊어진 부처님의 세계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상대적인 지식이나 경험의 가치를 무시하고 지금 살고 있는 세계를 떠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세계의 한계에 머물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눈병을 앓는 사람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허공에 피지도 않은 꽃을 피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허공에 꽃이 피지 않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 답변 여여 법사
역사성이란 것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것은 사실입니다. 시대에 상응한 삶의 갖가지 모습이 당시의 역사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의 수준에서도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항상 현재적인 시점에서 출발하면서도, 과거를 언제든지 그럴 듯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역사성의 함정이기도 합니다.
몇 가지의 단편적인 기록이나 유물은 이미 현재를 사는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추론(推論)만으로 역사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의 거울을 끝없이 닦습니다.
이끼가 끼고 색이 바랬다고 하지만, 그 또한 당시 사람들로서는 분명 현재의 삶이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머무는 데 따라, 똑같은 역사라도 그 해석은 얼마든지 춤출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역적으로 알고 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충신으로 평가받기 시작하기도 하고, 무능한 사람이 유능한 사람으로, 유능한 사람이 무능한 사람으로 자리바뀜을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굴욕의 역사가 민족의 저력을 증명하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나름대로의 역사성으로 포장된 주장은 불교 또는 부처님을 대하는데 있어서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불교를 과거 한 때의 해프닝 정도로 치부하려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현재의 가치기준을 앞세워, 마치 용도폐기된 상품과 같은 취급을 하려고도 합니다.
또한 겁(劫)과 같은 시간관념을 예로 들어서, 불교를 비역사적이라든가 신화화된 역사일 뿐이라고 단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당연합니다. 부처님으로 표상화된 불교가 때와 곳을 따라 다르다면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만이 진리입니다. 즉 공간적인 타당성과 시간적인 보편성은 진리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예외가 인정된다면 감히 진리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불변(不變)의 진리를 발견하신 분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셨다고 하는 것은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마음을 잡지 못합니다. 현재의 마음도 붙들지 못합니다. 미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흐르는 마음을 쫓기 보다는 흐름 자체로 사는 것이 본래의 인생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부처님의 세계는 우리들의 생각을 기준으로 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인정합니다. 3000년 전의 역사적인 인물로서만이 아닙니다. 삶을 일궈가면서 문제가 발생하는 한, 부처님은 언제나 삶의 중심에 섭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세상에 몸을 나투셨던 때를 살던 사람들이나 지금의 우리들이나 괴로워 한다는 상태는 변함이 없습니다. 때문에 인간에게 문제가 있는 한, 그리고 괴로움이 끊이지 않는 한 앞으로 3000년 후도 부처님은 오늘의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작위적으로나 인위적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역사의 산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몇 년이든 날마다 오늘입니다. 이 오늘에 눈을 뜨고 부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問] 그러면 부처님이 사시는 세계는 우리의 삶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입니까?
언제 어느 곳에서나 우리에게 다가오는 분이 부처님입니다. 아니 원래부터 와계셨습니다. 아직도 말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부처님으로 살게 되었지만 스스로 그것에 눈을 감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같은 분이지만 각자가 맞이하는 부처님은 다를 수 있습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보십시오. 별빛은 항상 했지만 바라보기 전까지는 아직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별빛의 밝음은 오로지 나에게 도달한 밝음일 뿐입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나를 향해 빛나는 빛인 것입니다.
법우님은 지월(指月)의 비유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밤하늘에 뜬 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그런데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을 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상대적인 지식이나 경험의 세계가 손가락이라면, 달은 상대가 끊어진 부처님의 세계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상대적인 지식이나 경험의 가치를 무시하고 지금 살고 있는 세계를 떠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세계의 한계에 머물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눈병을 앓는 사람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허공에 피지도 않은 꽃을 피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허공에 꽃이 피지 않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 답변 여여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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