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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을 구하지만 신통치 못한 까닭

문사수 2013.03.20 조회 수 25192 추천 수 0

자신이 신통(神通)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앉은자리에서 천리(千里) 밖을 본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내생(來生)에 벌어질 일까지 손바닥 보듯 안다고 자처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런 경지가 과연 가능하냐 아니냐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무척이나 대단하다고 평가하는 인심(人心)이 또한 끊이질 않습니다. 이렇게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능력을 자신이 발휘한다거나 또는 다른 사람이 갖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사회적으로 널리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신통(神通)이란 신과 통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시간적으로 볼 때 과거에 통한 적이 있었다는 게 아니라, 지금 진행(進行)되고 있는 과정이라는 시사(示唆)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공간적으로도 삶의 현장을 떠난 다른 곳이 아니라, 구체적인 몸짓을 벌이는 이곳을 한 치도 떠나지 않습니다. 요약하자면, 신과 언제 어느 곳에서나 통하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신통이라고 합니다.
동양사상에서 신(神)이란, 자신의 정신세계 그 자체가 있는 그대로 걸림 없이 드러나고 있는 상태를 일컫습니다. 그렇다면 삶이 전개되는 어느 한 순간도 신과 통하고 있지 않은 한, 그것은 살아도 사는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원인이 따로 있고 결과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이 다만 본래 그대로 신(神)입니다. 본래부터 신이었기에 자신의 삶이란, 자신의 신과 통한 그대로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네 삶이 온통 신비(神秘)로 가득 차 있다는 지적은 단순히 영감이 넘치는 시인의 탄식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사실 지난날들이 신과 통하지 않은 적이 없이 살아왔다면, 앞으로 살아갈 날들은 감추어진 신 즉 신비(神秘)와 통하며 살아갈 날들일 따름입니다.

부처님은 신비(神秘)한 현상(現象)을 바깥에서 따로 찾으려고 하는 시도에 대해서 이렇게 강한 어조로 경고(警告)를 하십니다. 

  “만약 형상(形相)으로 나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音聲)으로 나를 찾으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邪道]를 행함이니,
   여래(如來)를 능히 뵙지 못하리라”
                -금강경-

그러므로 자신의 생명가치를 바깥에서 찾는 사람을 외도(外道)라고 하는 내력은 굳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다만 매 순간마다가 신통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솔직한 자기점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자 녀석이 갑자기 옹알이를 하며 무언가 의사를 전하려는 듯하면, “그놈 참 신통하다”고 흐뭇해합니다. 그러다가 그 손자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다니며 보고 배운 것을 얘기할 때도 “그놈 참 신통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아이가 나이 스무 살 쯤 되면 길을 활보하고 어려운 말을 지껄여도, “그놈 참 신통하다”는 얘기는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신통하다고 할 때는 자기 기준에서 옹알이를 하던 애인데 갑자기 말이 터지니까 신통하다는 것이고, 기어 다니던 아이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니까 신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막상 그런 행동들이 몸에 배어 자연스레 드러나게 되면, 그때부터는 그런 행동을 신통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준에서 평가할 수 있는 기대치(期待値)를 넘어섰을 때만 신통하다고들 합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신통은 항상 벌어지고 있습니다. 살아온 어느 한 찰나도 신통하지 않은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습관상 특별한 것만을 신통이라고 할 뿐입니다.

따라서 신통을 하나의 목적격(目的格)으로 삼고 붙잡으려 하는 한, 그것은 이미 신통이 아닙니다. 신통을 대상(對象)으로 여긴다는 것이야말로 신통하고 있지 못하다는 확실한 증거이므로, 이는 미신(迷信)이 되어 스스로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고 마침내 파멸의 길에 이르게 됩니다.
잉카제국을 침략했던 코르도바는 백마(白馬)를 타고 쳐들어갔습니다. 당시 잉카인에게는 피부가 흰 사람이 백마를 타고 오면, 그는 신이 보낸 전령이라는 전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코르도바는 그 전설을 이용해서, 자신이 바로 신(神)이 보낸 전령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호의를 표하는 왕에게 거짓 약속을 하며 접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코르도바는 상대방의 믿음을 배반하고 수 백 만 명의 사람들을 죽였고, 그 찬란한 문명(文明)도 종지부를 찍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든 그것을 대상화한 사람은, 그 대상화된 믿음에 의해서 거꾸로 구속되기 마련입니다. 잉카인들의 믿음을 두고 비웃을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아무튼 백마 탄 백인이 신의 전령일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으로 해서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돈이든 정치적인 성취든, 현상적인 것을 대상화하여 구하려고 할 때, 구하려는 것과 구하려는 사람은 대립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구하려는 마음 때문에 구하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행여 구하는 바를 얻는다고 해도, 자신이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끝내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고 맙니다. 구하는 데만 급급했지, 그것을 구해서 뭘 하겠다는 생각조차 없는 사람에겐 그것을 손에 쥐어줘도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인생 자체는 무한히 신비(神秘)로 가득 차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비함과 무한히 통할 줄 아는 사람만이 신통할 따름입니다. 신통하지 않다는 것은 그 신비한 세계를 향해서 스스로를 통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만약 스스로를 통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면, 이는 자신의 인생을 단정 짓고 있기 때문이지 다른 누구의 잘못이나 운명의 장난도 아닙니다.

이것이 신통(神通)을 구하면서도 실로는 신통치 못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비로소 해결을 위한 하나의 역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신통하려면, 다시 말해서 신비의 세계와 항상 통할 수 있으려면, 자신의 무지(無知)부터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무!”하는 삶입니다.
“나무!”하며 현상적인 테두리 속에서 사는 것을 참된 인생으로 착각하고 있는 자기모순을 인정함으로써, 여태까지 신비를 가로막고 있던 삶이 신통하게 전개될 것이기에 말입니다.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이 말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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