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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南無와 자유自由

문사수 2011.06.22 조회 수 24190 추천 수 0

나무南無와 자유自由

 부처님이나 보살님이 앉는 자리를 사자좌라고 합니다. 마치 정글에서 사자를 당할 동물이 없듯이, 사자좌에 앉았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어떠한 패배도 용납치 않는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자좌에 앉은 미가대사에게 볼품없는 몰골로 나타난 선재가,
 “제가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행복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지 궁극의 길을 갑니까?”
하면서 법문을 청했을 때, 스스로 사자좌에서 내려와 선재를 향해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합니다.
 오체투지는 몸의 다섯 갈래인 머리와 양팔 그리고 양다리를 던져 땅에 밀착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인사 이상의 깊은 상징성(象徵性)을 갖습니다.
 첫째는 육신(肉身)으로 대표되는 돈이나 명예나 권력 그리고 지식과 같이, 평소에 자신이 의지하는바 현상계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선언적인 의미를 들 수 있습니다.
 둘째는 이렇게 상대에게 자신의 목숨자리까지 완전히 맡겼기에, 이제부터는 살려지는 것밖에 없다는 안심(安心)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상의 두 가지 의미를 합쳐 우리는 매일 ‘나무(南無)!’하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100% 맡겼기에, 이제부터는 상대해야 될 대상마저 사라집니다. 다만 남는 것은 또 다른 나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로부터 너와 나 사이의 차별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평등한 생명가치로 귀일(歸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재가 미가대사를 스승으로 믿고 찾아와서 절을 올립니다. 그런데 오히려 미가대사가 선재를 향해서 절을 올립니다. 참으로 기막힌 장면 아닙니까?
 맞절하는 스승과 제자입니다.
 선재는 미가대사의 육신(肉身)을 본 것이 아니었고, 미가대사 또한 선재의 나이를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부처님생명과 부처님생명이 만나서 서로를 향해 절을 올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부처님생명인지 아닌지를 따질 새가 없습니다. 내게 보이는 사람이 부처님생명이라면, 그분 앞에 절을 올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선재가 미가에게 맡겼을 때, 미가 또한 선재를 향해서 전생명(全生命)을 던집니다. 왜냐하면 선재나 미가라는 이름의 다른 생명이 아니라, 저 생명을 나의 참생명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순간입니다.
 육신의 테두리에만 머물고 있던 한계의식(限界意識)이 동시에 무너집니다. 부인으로 보이고, 자식으로 보이고, 친구로 보이던 그 사람이 진정 자신의 참생명으로 다가옵니다. 이때 그 사람은 이미 내 생명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나의 참생명 또한 육신이 아니므로 다가온 부처님생명에게 절을 하게 됩니다. 인연에 따라 육신을 나타냈을 뿐이므로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에게 절을 드립니다.
 그러니 하심(下心)하게 됩니다.
 못나서가 아닙니다. 자존심을 굽히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알고 보니 내가 만나는 모든 인연들은 부처님생명끼리의 만남으로 이루어지기에 그렇습니다. 부처님생명이 아버지의 모습으로, 부처님생명이 딸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의 본래 자리입니다.
 따라서 나무(南無)하는 삶은 언제나 대승적(大乘的)으로 전개됩니다. 상대적인 가치관을 절대적으로 부정합니다. 깨끗함과 더러움,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과 같은 흑백논리의 잣대를 휘둘러 편벽된 선택을 앞세우기보다는, 전방위적(全方位的)인 생명관(生命觀)을 갖고 모든 인연들을 싸안습니다.
 특정한 면만을 그 사람의 생명가치라고 보아선 안됩니다. 근원으로서의 부처님생명과 전체로서의 부처님생명으로 보아야 합니다.
 인생은 모두가 부처님생명 안에서 이루어지고 부처님생명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내 식으로 쳐놓은 올가미로 부처님생명의 목줄을 죌 권리가 나에게는 없습니다. 또한 설사 그런 막되 먹은 시도를 한다 하더라도 외부의 힘에 의해 좌우될 부처님생명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너나없이 자유(自由)를 외칩니다. 세상에 자유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자유란, 임제(臨濟)스님이 말씀하셨듯이 ‘스스로 말미암는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freedom과 같은 상대적(相對的)인 개념과는 도저히 격(格)을 나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말미암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생명 스스로에게 말미암을 때만 우리의 진정한 인생입니다. 참으로 걸림 없이 떳떳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본연(本然)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갖가지 정치적인 스캔들이나 스포츠의 승부에 자기 인생의 성패가 걸려 있기나 한 듯이 난리들 아닙니까? 
 우리 각자는 각자 선택한 삶에 있어서 지도자입니다. 내 삶을 책임져야 할 당사자입니다. 내 삶과 관계되어 있는 모든 인연들, 모든 만남을 책임져야 될 주인공들입니다. 선거를 통해서 뽑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각자의 인생이 타고난 자유(自由)의 삶을 만끽하는 그런 위대한 부처님생명들입니다.
 따라서 나 한 사람이 부처님생명으로 살아갈 때, 인연을 맺은 모든 분들의 생각도 변하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그리고 이는 생각만으로 끝나지도 않습니다. 이때부터 엄청난 인연의 법칙이 발동하기 시작합니다. 나와 이미 인연 짓고, 지금 인연 짓고 있는, 앞으로 인연 지을 사람들의 행동거지가 바뀝니다. 말투가 바뀝니다. 모든 생활태도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마침내는 몸담아 사는 모든 세계(世界)마저도...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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