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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의 정체

문사수 2011.06.04 조회 수 27190 추천 수 0

괴로움의 정체

인생살이는 마치 배에 의지해서 먼 바다를 항해(航海)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다보면 거친 풍랑을 만나거나 때로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기도 합니다. 물론 닥칠지 모를 어려움이 무서워 안전한 항구에 계속 정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배에 승선한 목적에 어긋납니다. 항해란 바다를 가르며 진행하는 것이고, 항구란 가는 도중에 잠시 머무는 곳 이상의 의미가 없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배가 전진하기 위해서 바닷물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중의 상식입니다. 또한 우리는 배에 의지해서 바다를 건넌다는 것도 두말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때 파도가 치는 것을 두려워만 할 일이 아닙니다. 배를 몰고 있는 주인공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선장이 되었든 일반승객이 되었든, 그런 입장의 차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온 지구의 물이 다 몰려와도, 배 안으로 물이 스며들지만 않으면 결코 가라앉을 일이 없습니다. 바깥에서 몰아치는 엄청난 물을 보고 지레 겁먹을 하등의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넓고 깊은 바다가 때로는 격랑으로 다가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짜증나게 하는 것 같지만, 적절한 대응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항해를 돕는 조력자의 구실을 하기도 합니다. 배 안으로 물이 밀려들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바깥에서 다가와 우리를 괴롭히는 괴로움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어머니의 딸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것은 항상 된 모습이 아닙니다. 세월의 흐름 따라 똑같은 본인이 다시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어 계속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나 어머니라는 이름은 세상을 항해하기 위해서 올라타는 많은 배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이름의 배를 이용해서 세상을 살아가려는 것이지, 특정한 이름의 배만을 고집하는 것이 진정한 목적은 아닙니다.
  따라서 아버지나 어머니와 같은 고정된 역할만을 고집하는 한,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미처 배려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괴로움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어릴 적에는 내 아버지 내 어머니의 아들 노릇 딸 노릇을 하다가, 나이 먹어서는 내 아들 내 딸의 아버지나 어머니 노릇을 하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참생명을 돌아보지 않은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 괴로움인 것입니다.
  괴로움이란 별스러운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참생명을 다른 인물과 착각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생명은 뒷전에 두고 나의 역할만을 본데에 말미암습니다. 부모나 자식 노릇을 하는 것인데, 자신을 부모나 자식으로만 규정해 버렸습니다. 부모나 자식을 인연(因緣)지어진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고, 나의 자식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소중한 인연은 될지언정, 나의 부모나 자식은 이 세상 어디에도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우리 자신도 부모나 자식의 인연은 짓고 있어도, 부모나 자식만으로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참생명을 다른 인물로 착각하였기에, 그에 따른 괴로움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이런 착각은 무척이나 익숙합니다. 전시된 그림을 보면서 그림만 보지 않습니다. 화가(畵家)를 꼭 걸고 넘어갑니다. 그림이야 고정된 결과물이니 마땅히 비판(批判)의 대상이지만, 그 화가의 예술성이 비난(非難)받아야 할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축구경기를 보면서 선수의 미숙한 플레이에 대해서 비판할 수는 있어도, 그 선수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가능성이나 체력에 대해서까지 비난하는 것은 엄청난 월권(越權)입니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는 것이 그 사람의 음악성(音樂性)이 없다는 증거가 될 수 없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찌 노래만이 음악이겠습니까? 노래를 잘하지 못하는 작곡가나 연주자가 얼마나 많은데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특정의 역할이나 표현방식만을 고집하거나 다른 사람이 그렇다고 규정함으로써, 갖가지의 괴로움이 발생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괴로움이 나쁜 것이라는 편견(偏見)을 벗을 때가 되었습니다. 괴로울 때일수록 오히려 내어 쓰지 않고 있던 자신의 참생명을 돌아볼 계기로 삼아야 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괴로워하도록 방치해왔던 자신의 지난 삶을 비판(批判)할망정, 무한하기까지 한 삶의 가능성마저 싸잡아 비난(非難)하려는 것은 곤란합니다. 따라서,
 “고정된 역할을 앞세우다보니, 참생명의 가치를 돌아보는데 너무나 게을렀구나”
하는 반성과 더불어,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참생명의 간곡한 권고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바다P106049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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