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듣기
 

참생명의 인간에게 공양한다

문사수 2010.05.01 조회 수 27429 추천 수 0
유불여불[唯佛與佛]

요즘 새로 지은 아파트를 방문하려면 얼굴 표정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인터폰을 누를 때 찡그린 얼굴을 하게 되면, 손님맞이하는 집주인의 마음을 괜스레 짜증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조그만 카메라의 눈을 통해 주인은 손님을 선택할 수 있는 1차적인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집안에 비치되어 있는 화면에 행여 잡상인 같은 적절치 못한 인물이 등장하면 아예 대꾸를 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폐쇄회로로 연결된 인터폰을 빌어 상대를 알아본다는 것은 우리의 평상시 사고방식의 한 단면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는 어느 가정주부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인터폰 소리가 울리면서 남편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납니다. 그러면 두말없이 반갑게 문을 열지요. 화면에 등장했던 남편은 본체만체 하면서 현관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자, 그럼 잠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과연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은 진정코 남편의 실상인가요?
 물론 남편이라고 의심치 않으니까 문을 열겠지만 뭔가 미심쩍습니다.
 몇 초 전 까지만 해도 카메라의 눈을 통해 화면에 비친 사람을 남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화면에 나타났던 남편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요? 인터폰의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남편은 사라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자신의 눈을 통해 보이는 사람이 남편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육체를 남편이라고 한다면 어떤 부위가 남편의 실체인가요?
 얼굴인가요? 얼굴인 듯 하지만 눈이 있고 귀가 달려 있습니다. 또 팔다리를 휘젓습니다. 팔다리인 듯 하지만 묵직한 몸통도 있습니다. 몸통인 듯 하지만 뻣뻣한 등이 있고 불룩한 배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장도 있습니다. 심장이 있고 간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아무리 육체를 해부해 보아도 남편의 실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남편은 물질이 아닙니다. 남편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드러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육체와 같이, 참으로는 있지 않은 것을 있다고 주장하기에 바쁩니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배를 불쑥 내밀면서 서로를 손가락질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런 세계를 참으로 있다고 믿고 있는 한, 생사(生死)의 문제는 언제까지나 해결되지 않습니다. 제 식으로 사는 것만을 자랑하기에 다른 생명과 대립된 세계에 살게 되고, 부조화에 의한 갈등을 양산할 따름이지요. 생명을 육체로만 한정시키니 생명의 교류가 가능할 턱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흔히 말하는바 불행(不幸)의 속 내용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참생명의 법칙에 따르지 않는다면, 자신이 선택한 틀에 갇혀 스스로를 파멸케 할 뿐입니다.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막상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말이지요.
 
 어떤 중년 남자가 몇 번의 낙방 끝에 드디어 운전면허를 땄답니다.
 그런데 의기양양 하게 집에 돌아온 이 사람에게는 엄청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면허 딸 날만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이 일을 저지른 것이지요. 성질도 급하게 벌써 새 차를 뽑아 놓고는 내친 김에 여행갈 준비까지 끝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체면상 운전을 못한다고 할 수도 없는 처지인데다, 까짓 것 하는 오기까지 발동해서 차를 몰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고속도로까지는 무사히 진입했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피곤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휴게소가 보이니 이곳이 극락 아닌가? 그렇다고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도 못합니다. 머릿속은 온통 운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던 것이지요.
 ‘이제 목적지 까지 제대로 갈려면 절대로 한눈을 팔면 안 된다. 잡념을 일으켜도 안 된다. 다만 운전에만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이렇게 단단히 마음먹고 드디어 출발하는 데 뭔가 잊어버린 듯 섭섭하지만 잡념은 금물입니다. 입은 굳게 다물고 부릅뜬 눈은 전방을 주시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봅니다. ‘어떻게 목적지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단 말인가? 역시 나는 천부적인 드라이버인가 보다.’
 이렇게 안심하며 목적지에 주차하려고 하는 데,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게 무엇인지 떠올랐습니다.
 휴게소에 내려놓았던 가족들을 잊고 왔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은 언제라도 우리를 배반합니다.
 인간은 육체가 아닙니다. 육체를 휘감고 있는 나이나 지위 또는 명예는 더더욱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챙겨야 할 것은 참생명의 가치뿐입니다.
 들판을 수놓는 꽃들을 봅시다.
 깨끗하고 더러움의 구별이 없습니다. 아름답고 추한 것은 관찰자에게만 있을 뿐, 꽃 자체와는 하등의 관계도 없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대하는 데 있어서, 잊어서 안 되는 점은 바로 모든 생명마다 절대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생명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갖게 되면, 저절로 생명의 교류(交流)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항상 새로운 교류가 이루어 질 때, 우리가 산다는 것이 우연(偶然)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모든 생명들의 목적이 우리들 각자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우리에게 모아지는 생명의 흐름은 잠시도 멈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듣는 어떤 사람은 혹시 의문이 일어날지 모르겠습니다. 
 
 “교류란 무엇인가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그런데 개별생명들 사이에는 텅 빈 공간만 있을 뿐이지 않은가?” 
 
얼핏 생각하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와 대화할 때를 떠올려 본다면, 그 의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즉 나와 다른 사람 사이가 완전히 비어 있다면, 아무리 큰 소리로 떠들어도 상대편은 전혀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음파(音波)는 물론이고 말 속에 담기는 미세한 감정까지 전달하는 그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는 것이지요.
 끊임없이 생명들을 이어주는 현상을 접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그것은 개별생명들과 분리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생명들마다를 관통하고 흐른다고 함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로 이어진 모든 개별생명들은 더 큰 하나의 생명에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임이 증명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휴식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나를 관통하고 있는 뭇 생명들과의 교류가, 나로 대표되는 생명현상을 가능케 합니다. 이는 곧 나라고 하는 개체는 나로 집중된 모든 생명들이라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참된 삶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는 어떤 조건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무조건(無條件)입니다. 원래부터 조건이 붙지 않은 베풂이었는데, 나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생명력은 내 것이 아니므로 실제로는 베푼다는 말도 맞지 않습니다. 무조건 베풀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용서할 수 없는 한 사람이 머리에 떠오르나요?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어떤 개별생명일 지라도, 결코 나와의 생명교류를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알량한 논리의 틀에 집어넣어 동어 반복적(同語 反復的)인 결과를 끌어내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상대가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하기에 앞서, 자신이 그 사람의 생명가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점검해 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상대의 참생명을 나쁘게 보고 있다면, 그 생명과 교류를 멈추지 않고 있는 자신의 참생명을 나쁘게 보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은 나와 한 바탕에 자리한 참생명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진정으로 나쁜 사람이라면, 자신의 참생명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따라서 나의 참생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상대에게 공양(供養)합니다. 너와 나는 생명의 교류를 멈추지 않는 한생명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조금 먼저 알고 있는 나부터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커다란 선물을 한 아름 받아듭니다.
 나를 살려주던 생명의 베풂이 또 다른 베풂을 낳으니, 오로지 기쁨만이 함께 합니다. 어떤 모양을 갖는 공덕이 아니라, 아무런 모양도 갖지 않는 ‘무(無)’의 공덕이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마다 ‘부처는 부처와 함께 할 뿐 [唯佛與佛]’이라는 말이 빈번히 등장합니다.
 받은 기쁨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는 것이 우리 참생명의 법칙입니다. 기쁨은 이렇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헤아릴 수 없는 공덕으로 넘치는 기쁨에 눈을 뜬 우리의 삶은 부처님생명의 성취를 만끽하게 됩니다. 진작에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있는 참생명의 자리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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