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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공급이 이루어지는 세계

문사수 2010.03.25 조회 수 24119 추천 수 0

-출가에서 열반까지-

우리 불자(佛子)들은 경전을 모실 때마다 고마움을 갖게 되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이와 같이 들었다’의 역사적인 주인공인 아난(阿難)존자입니다. 그 분으로 인해서 거룩한 부처님의 말씀을 모실 수 있으니 당연히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표적인 악인(惡人)으로 이름난 데바닷다가 아난과 친(親)형제간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더군요. 게다가 석가모니부처님과도 사촌(四寸)간이었음을 상기해본다면 무척이나 머리가 혼란스러울지 모르겠습니다.
 형제가 지향한 삶은 사뭇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부처님을 시봉(侍奉)하는데 생을 바치고, 다른 한 사람은 오직 부처님을 해치려다 생을 마쳤습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기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형제니까, 최소한 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하리란 일반의 기대와 전혀 다른 길을 갔던 것입니다.
 어찌 아난형제만이 그렇겠습니까? 어느 집 할 것 없이 식구마다 택하는 삶의 방식이 같은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이는 곧 삶의 최소 단위인 집이, 선택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집에 머물고자 하지만 도저히 머물 수 없다는 딜레마를 극복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언젠가는 허물어지고 흩어질 것이기에, 참으로 믿을 바가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한계를 알면서도 집안의 논리로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겠다고 한다면, 스스로가 미더워 하지 않는데 무슨 성취가 따르겠습니까?

출가(出家)의 당위는 그래서 등장합니다. 단순히 거주하던 집과 정들었던 가족을 떠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육신을 중심으로 한, 핏줄을 근거로 한 집이 실재하지 못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정화된 관념과 습관의 벽을 타고 넘어, 자신을 자신답게 드러내려는 적극적인 삶의 지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출가는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와의 관계를 끊으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참생명으로 어우러진 조화의 상태로 만나려는 적극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출가만으로 그런 이상적인 삶이 보증될 수 있을까요? 출가란 진정한 삶을 향한 기본 조건이지, 아직은 궁극 그 자체가 아닙니다. 만약 자신의 관념과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 상태를 만족시키려만 한다면, 출가라는 이름의 또 다른 집에 틀어박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 아까 예를 들었던 아난의 형제 데바닷다가 어떻게 죽음에 이르는지를 살펴봅시다.
 데바닷다는 부처님을 살해하려고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서 풀어놓았지만 실패합니다. 코끼리가 부처님께 무릎을 꿇어버린 것입니다. 다시 바윗돌을 굴렸지만, 바윗돌이 부처님의 엄지발가락을 살짝 스쳤을 뿐입니다.
 그러자 악에 바친 데바닷다는 직접 나섭니다. 데바닷다는 손톱에다 독약(毒藥)을 바르고 부처님께 다가갑니다. 그런데 얼마 후 손톱에 바른 독이 자신에게 먼저 퍼지면서, 그대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졌다고 경전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을 살해하려고 하는 자, 자신이 먼저 죽기 마련입니다.
 부처님은 다만 자비로 세상을 대하시기에 상대인 적(敵)이 없는 분이지만, 데바닷다는 부처님을 죽여서 자기가 살려고 했습니다. 부처님을 부처님생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육신(肉身)으로만 보며 대립하였습니다. 이는 곧 자신을 육신의 한계에 가두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생사(生死)를 면치 못하는 육신에 갇혔기에 스스로 지옥에 떨어졌다는 얘기가 됩니다. 따라서 지옥에 떨어진다는 의미는, 우리가 눈에 보이는 육신의 한계 속에 갇혀있을 때 필연적으로 맞게 될 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삶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에게 기다리는 것은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으로서의 내가 죽지 않겠다고 제아무리 버텨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실로 있지 않은 것을 붙잡으려고 발버둥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육신으로 자신을 한정시키는 한, 현상계에서 벌어지는 죽음은 슬프거나 좋거나에 관계없이 그냥 벌어질 따름입니다. 세상에 다시없을 영약을 마시고 산삼(山蔘)을 뿌리째 삼켜도 죽지 않을 요행수는 없습니다.
 과연 이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좋은 것 다 먹고, 누릴 것 다 누렸는데 끝내는 죽고 맙니다. 만약 몸뚱이가 진정 나라면 이같이 비참할 수는 없습니다. 죽기 위해서 산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지 죽기 위해서 사는 삶일 리가 없습니다. 때문에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린 자꾸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망상을 갖고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육신으로서의 죽음이 벌어질 뿐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받아들이려는 입장에 서야합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나의 참생명에는 죽음이 없다고 하는 엄연한 사실을 깨달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참생명을 성취하려는 출가인(出家人)인 법우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가 열반증득(涅槃證得)을 목적으로 삼는 이유입니다.
 비록 내 지위가 없어질 수도 있고, 내 재산이 손상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이 좀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상적인 잣대는 중생살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래부터 실재하지 않으면서, 인연에 따라 나타났다 없어질 뿐입니다.
 대개 ‘내 몸뚱이 갖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뭘 그래? 부모도 간섭 못해!’라고 하지만, 몸뚱이는 원래부터 나의 소유(所有)가 아니었습니다. 부모님과 세상이 공급해 준 양분을 먹고 자란 결과물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성장하는 동안 따뜻한 말 한 마디나 사소한 가르침이라도 베푼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 생명의 내용을 채워주었으므로 그만큼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마저도 내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합니다. 자살(自殺)이 죄가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감히 어떻게 죽입니까? 세상이 먹여 살렸는데 어디 감히 손을 댑니까? 아무 자격도 없습니다.
 자신을 육신에 한정시키면서 마음대로 사는 것은 생명의 법칙이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세상이 베푸는 무한한 공급에 반응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무한히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사람에게 그에 걸맞는 공급의 결과인 무한한 성취가 따르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돌이켜 봅시다. 많은 분들이 베풀지 못하고 인색하게 사는 이유는, 그 사람들의 천성이 고약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게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스로를 물질도 마음도 가난하다고 단정한 사람이 어떻게 베풀 여유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열반이 내 생명의 진실임을 믿게 된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중생이라는 틀을 이미 훅 불어서 꺼버렸습니다. 죽음을 바탕으로 한 걱정도 근심도 다 놓아버렸습니다. 육신을 중심에 둔 중생이란 망상의 틀이 없어지고,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이라는 절대적인 생명관(生命觀)을 확립하였기 때문에 다만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굳게 의지해 온 육신이었기에 죽음을 계기로 행여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이제 알고 보니 몸으로 대표되는 생명 현상은 세상이 빌려준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번뇌의 불길이 꺼져버린’ 열반을 증득하였으니, 더 이상 번뇌에 질질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무한공급에 따른 무한능력을 발휘하고 살면 그만입니다. 남은 할 일이라고는 기쁘게 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삶의 진실은 삼천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고 나시니까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펄떡거리는 생명력이 되어 우리 삶의 원리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육신으로 영생(永生)하는 것을 일러 영생이라고 하면서, 석가모니부처님은 영생을 못했다고 하는데, 육신을 자신과 일치시키려는 그런 생명관이 얼마나 유치한 얘기입니까? 물질 수준으로 한정되어 보이던 싯다르타의 육신은 돌아가셨지만, 부처님생명은 없어지고 말고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리하는 곳마다에서 삶의 원리로 이미 함께 하고 계실 따름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음을 믿습니다. 이는 나의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이 열반에 들어 있는 것을 믿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성취된 열반, 그래서 완전한 공급이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에 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내가 그런 상태를 바라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넉넉하게 누리고 살면 그만입니다.
 다음이 아닙니다. 언젠가도 아닙니다. 또한 다른 곳에서도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사람이 지금 만나는 사람입니다.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 이 시간입니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곳은 지금 내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 됩니다.
 일부러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을 찾아 헤맬 여분의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여기를 빼놓고서 우리 삶의 진실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삶을 자기 삶의 내용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굳이 따로 대접받을 새가 없으므로 주기에 바쁜 것입니다.
 이렇게 출가(出家)부터 부처님의 열반 모습까지를 들여다보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전의 모습은 현상계에 사는 중생들의 착각하고 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과거(過去)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未來)는 부처님이 열반하신 세계밖에 남은 게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눈앞에 보이는 수준에 머무는 한 지옥은 분명히 벌어집니다. 데바닷다가 손톱에 묻혔던 독 때문에 스스로 무간지옥에 떨어졌듯이, 내가 세상을 한정시켰을 때 삶의 의미는 상실됩니다. 앞으로 몇 십 년의 세월을 더 산다 해도 죽음에 잠겨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살아도 산 게 아니란 말입니다.
 반면에 자기 삶의 사명을 잊지 않는 사람, 태어나서부터 자기가 무한한 공급 속에서 살고 있음을 절대 의심치 않는 사람은 세상에 희사하기에 바쁩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을 나로부터 공급한다는 원리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사람을 일러 잘산다고 합니다. 윤택한 살림이란 누릴 자격을 갖고 있는, 즉 열반을 참생명의 진실로 받아들여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세계입니다. 무한공급이 멈추지 않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택한 세계의 주인이 되어 삽니다. 따로 윤택한 살림을 바랄 필요가 없기에 말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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