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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법傳法하여 부처님생명 성취한다

문사수 2010.03.19 조회 수 27718 추천 수 0
전법傳法하여 부처님생명 성취한다

언젠가 저는 법회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빨을 먼저 닦는가요? 아니면 얼굴을 먼저 닦는가요?”
 대중들의 반응은 하나같았습니다. ‘별 쓸데없는 질문을 다하는구나.’ 하는 표정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먼저 “저는 얼굴을 먼저 닦는데요.”하게 되었는데,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떤 분이 어이없다는 듯이 되묻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이빨보다 얼굴을 먼저 닦다니 불결하지도 않아요?”
 이와 같이 아주 사소한 개인적인 습관까지도 관행은 여지없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마치 누구에게나 통하는 진리인양 당당하게 주장되면서 말이지요.
 세수나 이빨을 닦는 것은 아침을 준비한다는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그 수단이 목적의 자리를 차지하고 맙니다. 내 식만이 옳고, 네 식은 그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확신은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엄숙한 얼굴로 날카로운 눈빛을 쏘면서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이렇게 사는 게 옳은 것이야!”
 참으로 너무나 다양하고 끈질긴 관행으로 가득 찬 우리네 인생입니다. 실재하지도 않는 것을 신주단지인양 받드는 사이에 우리들의 생명력은 위축되고 맙니다. 인생을 그렇게 결정론의 소산으로 치부한다면, 생명의 창조력이 발휘될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겁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마주하며 물어봅시다.
 우리들의 온갖 관행들은 언제나 옳은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자신에 대해 묻고 있는 한 아직은 늦지 않았습니다.
 물어야 할 참생명의 꿈틀거림이 있기에 말입니다.
 그래서 묻겠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무엇을 믿어왔던가요? 그리고 이제부터는 무엇을 믿어갈 것인가요?”
 바로 전법(傳法)이 그것이지요.
 관행에 따라 할까 말까 하는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살리고 살아가는 무한한 생명들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삶의 원리라는 뜻으로서 말입니다. 할 수 밖에 없는 생명운동인 전법.

오늘날 지구촌의 나날은 혼란의 연속입니다.
 시계(視界) 제로의 안개 속을 헤매는 운전사의 마음이 이와 같을까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리저리 휘둘리면서도, 마치 혼란을 태생부터 겪어 온 듯이 무덤덤합니다. 흔쾌히 받아들여서가 아닐 겁니다. 무얼 해도 속 시원한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지요. 과연 진정으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딱 부러진 답을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 뿐입니다.
 자기 일에나 몰두하고 제 가족이나 돌보면 그만이지요. 그러다보니 내면의 불안을 감추기나 하려는 듯, 만나는 사람마다 큰 목소리요 굳은 표정이지만 전해오는 생명감은 건조하기 짝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교류는 이미 포기한 지 오래지요.
 역설적이게도 불확실성(不確實性) 만이 확실한 사회입니다. 심지어는 수많은 가치체계가 난무하면서, 대중의 가치전환을 향한 힘을 잃은 종교(宗敎)마저 공해의 하나로 치부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지요. 믿을 사람이, 믿을 만한 가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법우들은 어렵게 사람 몸을 받은 데다, 덤으로 부처님가르침 까지 만났습니다. 이런 귀한 인연의 심중함을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 지금 사람의 몸을 받아 살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불교는 살아 있음을 말하고, 살아 있는 사람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불확실성이야말로 인연의 창조력이 발휘될 또 다른 기회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순(矛盾)은 항상 있어 왔습니다. 따라서 모순의 유무가 삶의 결정적인 인자(因子)는 아닙니다. 사람이 길을 넓히는 것이지, 길이 사람을 크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모순에 번민하며, 그 번민에 지지 않는 것이 결정적인 것입니다.

전미개오(轉迷開悟)라는 사유방식을 돌아봅시다.
 미(迷)란 세상의 사물이나 현상을 둘로 보는 것이지요. 현실이 혼란스럽다면, 그리고 그 혼란을 자신과 분리시키고 있다면 미혹한 상태입니다.
 현실은 내가 탐내어 소유한다고 소유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그 현실을 완성시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즉 현실은 소유가 아니라, 삶의 존재(存在)입니다.
 따라서 현실을 완성시켜야 삶은 완전해 집니다. 만약 문제가 많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취해야 할 것이 많다는 뜻이 됩니다. 또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삶의 가치가 무한하기에 성취된 것이 많다는 말도 됩니다.

그런데 진리란 시간적인 영원성(永遠性)과 공간적인 보편성(普遍性)을 확보해야 합니다. 말 그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遍知]여야 합니다.
때문에 불교가 이 사회에서 실천되기 위해서는, 그 사회와 구성원들의 생활에 적중할 수 있는 가르침이어야 합니다. 부처님가르침은 영원한 진리임에 틀림없지만, 그 필요에 따라 시대와 환경 속에서 적절히 해석되어야 생활의 지침이 될 겁니다.
 그럼 일반인들의 진짜 삶은 무엇일까요?
 먹고, 입고, 일하고, 즐기며, 아이 키우고, 시집보내고, 장가보내는 것들로 채워져 있는 일상입니다. 또한 그런 일상의 무료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름대로의 장치를 준비하고 있지요. 거의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타인과의 보편적인 공통항목을,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축적하고 있습니다. 스포츠, 예술, 친목회 등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대해 이중적(二重的)인 관계를 유지하는 버릇에 길들여져 왔습니다. 사물(가족, 역사, 경제, 사회체제 등)과의 객관적인 관계와 자기 자신과 마주보고 만나는 주관적인 관계가 곧 그것입니다.
 이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측면인 동시에 하나의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상태는 긴장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고해(苦海)지요. 괴로움과 마주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네 인생이고 괴로움을 참고 살아야만 하는 절박한  사바세계가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때문인지 대다수의 보살상(菩薩像)들이 생활인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우리가 머무는 세계란 무엇입니까? 조건화된 마음이 선택한 결과 이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온갖 삶의 주인공인 우리들과 항상 맞물립니다. 따라서 불교에 특별한 성질을 구별하는 것은 오직 구별 자체뿐입니다.
 이른바 정형화(定型化)된 불교는 과연 있을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이 고정되었다는 것은 입증되지 않습니다. 개념이나 실증적인 유혹에 발목 잡힌 어리석음의 소산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전법은 새로운 지향점을 목표로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전법에 따른 결과가 항상 새로운 것을 보증할 따름입니다. 이는 곧 불교에 의해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 속에서 살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가르침과 세상살이를 무차별적으로 동일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엄연히 부처님가르침이 주체입니다.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한 이 세상의 말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적극적으로 산다고 하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이는 곧 경문(經文)이나 관념으로 도피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어떤 분입니까?
 언제나 우리 삶에서 느끼는 괴로움의 신음소리를 자기화 하는 우리의 참생명을 말합니다. 이런 참생명의 삶을 실현하고자 함이 바로 전법의 당위일 겁니다.
 따라서 부처님가르침을 전한다 함은 내가 사는 길이요, 우리가 사는 길이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음을 되돌아보면, 언제나와 같이 살려주고 있는 모든 생명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갚는다 함은 행여 형식적인 말로 그칠 수가 있습니다. 은혜를 베푼 분들은 준 바 없이 주었을 뿐이지요. 따라서 받은 바 없이 되돌려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를 부처님가르침을 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 하나만이 아닌, 모두의 삶이 참생명의 길을 가야한다고 몸과 뜻과 말로 실천합니다. 이때 부처님생명은 세상에 출현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전법하는 사람의 세계는 이미 부처님세계입니다.
 부처님의 세계는 너와 나가 대립된 상대(相對)의 세계가 아닙니다. 한계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절대(絶對)의 세계로 드러납니다.

이와 같이 전법이란 자기방기요, 헌신입니다.
 자기만족적인 도취가 아닙니다.
 만나는 사람에게서 부처님생명을 보고, 거기 사는 나의 참생명을 보는 것입니다.
 인생이 몇 년이든 날마다 오늘입니다.
 이 오늘에 눈을 뜰 때 우리는 부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이 하나 되어 삽니다.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이라는 진실의 연꽃에 당신과 나는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moticon

1개의 댓글

Profile
성광
2010.03.19
'산다는것은 그 현실을 완성시키는것'이라는 시원한 구절등 법문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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