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법과 종말론
불교를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무아(無我)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모든 수행은 어떤 수행이 되었든지 무아를 전제로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아란 말 그대로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아를 밝히는데, 내 힘으로 내가 없다는 걸 밝히겠다고 하는데 있습니다.
‘내가 없다는 것을 나는 이만큼 알았어.’라고 하니 여기에서 모순이 생기는 것이지요. ‘넌 네가 없다는 것을 모르지만, 나는 내가 없다는 걸 아니까 역시 내가 잘나지 않았느냐?’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없다는 걸 밝힌다는 것을 쉽게 얘기하면 아상을 없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상이 없어지는 공부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한쪽에서는 나는 아상을 없애는 공부를 이만큼 했다는 아상이 반비례해서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없다는 공부가 다 헛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염불신앙(念佛信仰)은 내 힘으로 내가 없다는 걸 밝히는 공부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비추어진 세계는 내가 본래 없는 것이 드러납니다.
즉 내가 본래 없다는 부처님의 법문 앞에 내가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항복해 들어가는 것이 염불신앙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방에 먼지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이다가 아침에 햇살이 들어오니 온통 먼지투성이라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면 햇살이 들어오니 더러운 먼지덩어리가 생긴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두운 가운데서는 먼지가 있어도 있는 걸 모르고 지내다가 햇살이 들어오니까 본래부터 있던 먼지가 드러나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먼지가 많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보통 사람들은 때가 쉽게 묻기 때문에 흰옷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까만 옷에는 때가 안 묻고 흰옷에만 때가 묻나요? ‘여기가 희니까 여기에 묻어야겠다.’고 하는 때는 없습니다. 때라는 것이 어디든지 다 묻는 거지만 검정 옷에는 묻어도 안 보이는 것이고, 흰옷에는 묻으면 잘 보이는 것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많이 불러서 내가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내가 밝아지니까 내가 없구나’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나무아미타불을 할수록 ‘아직도 내가 있구나.’로 드러나겠습니까?
정말 중요한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내가 없어지지만 내가 없어진 것이 인식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가 없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어두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나무아미타불을 더 불러야 됩니다. 이렇게 나무아미타불을 정말 잘 부르고 있는 사람에겐 ‘내가 아직도 남아있구나’가 드러나서 점점 더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십 년을 공부해도 아직도 내가 남아있습니다. 이십 년을 염불했는데도 내가 남아있습니다. 참 부끄럽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항상 나를 낮추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나를 낮추는 사람이라야 무아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아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나 잘났다는 마음이 자리잡을 수가 없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이 비추어서 그것이 드러났을 뿐이지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염불의 과정만이 있지, 이만하면 공부가 되었다는 그런 때는 없습니다.
법우님도 공부하다가 ‘나는 이만하면 공부가 되었어.’ 하는 마음이 생기거든 얼른 나무아미타불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어두움을 없애는 것이 바로 염불입니다. 그러니 염불에 의해서 어두움을 없애는 사람임을 선언하는 것이야말로 괴로운 세계를 극복하는 진정한 방법입니다.
그러면 종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벌써 나왔다는 것을 법우님들은 아시겠지요.
종말(終末)이란 끝나는 날이 있다는 말이고, 이 말은 지금 내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내가 있기에 하나님이 심판을 해서 나를 지옥으로 끌어가거나, 혹은 내가 사는 지구덩어리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것으로 본다면 내가 없습니다.
나만 없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조물주를 부정한다고 했는데 그 조물주를 부정하는 것은 진리 말고 다른 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리란 온 우주에 두루하여 없는 곳이 없고, 없는 때가 없고, 없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리광명 말고 내가 따로 있다는 얘기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진리는 어디든지, 언제든지, 어느 경우에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구덩어리 밖에 어디 따로 이 우주를 만들었다 부수었다 하는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조물주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있지 않습니다.
이와같이 진리에서 멀어졌을 때가 말법(末法)이고 말세(末世)입니다.
내가 본래 없는데 내가 있다, 내 몸뚱이가 있다, 내 사상이 있다고 해서 나라는 것을 고집하는 마음이 굳어지면 굳어질수록 말법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곳을 오탁악세(五濁惡世)라 여기고 이 세상이 혼탁스럽다, 어둡다, 답답하다, 싸움이 많다고 하면서, 이 세상을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야 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원래가 좋은 세상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좋은 세상 아닌 게 나타난 것이 오탁악세란 말이고, 그것을 없애려면 몸뚱이가 나라고 하는 유물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유물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굳을 대로 굳어서 꼭 그것밖에 없는 것으로 알았는데, 유물주의를 내세울만한 물질자체가 본래 없고 본래 있는 진리광명 뿐이라는 것을 믿어서 유물주의 사상을 벗어나는 것밖에는 말법시대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원래가 종말이라는 건 없고, 말세라는 것도 부처님 법에서 멀어졌을 때를 말하는 것이지, 그러한 세계가 따로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공중무색(空中無色),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몸뚱이를 가지고 태어나니까 그 때 태어났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몸뚱이란 우리 생명의 도구이지 그 자체로서 우리의 참생명은 아닙니다. 또한 육신이 없어진다고 소멸하는 줄 알지만 그것은 육신만 소멸하는 것이지 우리의 참생명이 소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우리 참생명은 본래부터 무한 생명이며, 영원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로 향해있는 영원생명 그 자체입니다.
영원생명이란 무량수(無量壽)를 말하며 이것이 곧 아미타라는 말입니다. 즉,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부처님의 지혜광명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지혜광명을 받아들여서 부처님의 지혜광명으로 비추어진 나를 보니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불생불멸은 아미타(阿彌陀)라고 했으니 아미타란 바로 나의 참생명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란 분이 내 밖에 따로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밖으로 부처님을 찾는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는 말은 ‘나의 참생명으로 돌아갑니다’라는 말이라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돌아갈 것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중생이라고 가짜로 세워놓고 거기에 고집을 하고 사니까, 이런 거 다 내버리고 참생명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이지 사실은 돌아가고 말고도 없습니다. 말로 하자니까 참생명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지, 실로는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벌써 돌아가 있습니다. 그게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근거지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태까지 내 생명의 근거지를 내 육신에다 두었습니다. 육신이 ‘나’라고 하고, 내 이름은 김 아무개, 이 아무개다 그러면서 살았습니다. 이렇게 육신에 나를 맡기고 지내는 세계는 지옥입니다. 여기에서는 생존 경쟁밖에 벌어질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법문 듣고 내 생명의 본거지는 육신이 아니라 부처님생명의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생명의 세계를 다른 말로 극락세계라고 하니까, 우리들의 본적지는 극락세계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근거지를 극락세계로 바꾸고 나면 극락세계에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게 없고, 또한 극락세계에는 나 말고 남이 없으니, 이 세상 모든 생명체가 본래부터 동일생명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나무아미타불의 세계입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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