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두 가지 신심(信心)
옛날 분들은 ‘이종신심(二種信心)’이라고 해서, 두 가지의 믿는 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불교 신심의 첫째 측면은 ‘우리가 살고 있는 경험, 내지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질문에 바탕을 둔 믿음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불교에서는 인과응보(因果應報), 혹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을 이야기합니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를 업(業)이라고 합니다.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 말로 짓는 구업(口業), 또 마음속으로 생각을 일으키는 의업(意業)을 통틀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삼업으로 짓는 것이 모두 내게로 되돌아온다고 해서 자업자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착한 일을 하면 착한 일을 한 것에 대한 보답이 되돌아오는 것이고, 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그에 따른 재앙이 되돌아오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자업자득, 인과응보[원인과 결과가 相應한다]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착한 일을 많이 하더니 아주 잘살고, 또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나쁜 일만 많이 하더니 나중에 좋지 않게 되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어떤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또 어떤 사람은 복이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는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불교에서는 이에 대한 설명으로써 ‘인생을 단막극(單幕劇)으로 보지 말라’고 합니다.
인생은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이미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의 전(前) 생애를 전생(前生)이라고 하고, 후일에 나올 생애를 후생(後生)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전생이 있어서 전생 동안에 착한 일을 했으면 복을 받는 금생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고,
전생에 나쁜 일을 많이 했으면 금생에 복을 받지 못하는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과경(因果經)을 보면, ‘전생의 일이 궁금하면, 금생(今生)에 네가 받는 것을 보아라.
현재 경험하고 있는 운명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 전생에 네가 지은 것이다.
내생(來生)이 궁금한가? 금생에 네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생에 네가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현대인들은 대체로 전생이 있다는 말조차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들이 서로 다른 운명을 살고 있다는 자체가 전생에 각각 다른 업을 지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인데도, 과학적(科學的)으로 전생을 증명(證明)해 주기를 원합니다. 다행스럽게도 현대과학, 특히 심리학(心理學)에서는 대개 3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생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린애들이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생을 기억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사실여부를 알아보는 것으로 처음 이루어진 것은 1940년대 후반에 인도의 ‘샨티데비’라는 아이에 의해서입니다. 샨티데비의 이야기가 인도정부의 조사를 거쳐 신빙성 있는 사실로 공표되자, 미국의 이안 스티븐슨(Ian Stevenson)박사가 생각하기를, 샨티데비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20여 년간의 조사 끝에 누가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20여명의 전생담을 발표, 이 내용을 버지니아 대학교 출판국에서 책으로 발간했습니다. 이것을 ‘전생 기억자의 기억내용 확인’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투시(透視)의 방법입니다. 편지봉투에 편지를 넣으면 보통사람들은 편지내용을 알 수 없지만, 투시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편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초능력은 ESP라고 해서 제6감(第六感), 즉 우리의 감각능력인 5감(五感)을 넘어선 감지능력 중에 한 능력입니다.
이 방법으로 전생을 보게 된 것은 ‘에드가 케이시’ 라는 금세기 최고의 초능력자에 의해서입니다. 이 사람의 원래 직업은 사진사였는데, 어느 날 우연히 손님으로 온 사람의 몸을 투시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의 병과 병이 오게 된 원인을 밝혀주었는데, 나중에 점차로 병의 원인이 금생(今生)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생과 금생의 인과관계를 밝히게 된 것입니다. 이 몸에 나타나는 현상도, 주위의 사람들도,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는 것도, 운명 전체 모두가 에드가 케이시에 의해서, 전생의 것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심리적인 기법(技法)을 통해서 전생을 밝히는 최면의 방법입니다. 이 중에는 연령역행(年齡逆行), 혹은 연령퇴행(年齡退行)이라는 것이 있어요. 이것은 일종의 잠재의식을 통해서 하는 것으로 최면을 걸어서 연령을 뒤로 돌리는 것입니다.
미국의 푸에볼로시 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 ‘버언스타인’이라는 실업가는 “투시에 의해서만 전생을 밝혀낼 것이 아니라, 연령역행의 방법을 통해서도 전생을 밝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중년부인을 대상으로 해서 최면을 한 결과 그 부인의 전생을 밝혀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부인의 전생담이 ‘브라이디머피를 찾아서’라는 책으로 1956년에 초판 되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전생을 밝히는 방법으로 나타난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결국 전생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무한(無限)한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앞으로의 미래도 무한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참생명은 무한생명이라는 것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무한생명이 나타나는 방식은 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반복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를 윤회(輪廻)라고 합니다. 인생은 단막극이 아니라, 무한한 장편소설입니다. 각 장마다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공통된 줄거리로 이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1장에서 있었던 일이 제2장으로 이어지고, 제2장에서 있었던 일이 제3장으로 이어지는 인과응보의 과정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내가 지은 것은 내게 돌아오고, 내가 짓지 않은 것은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절대법칙(絶對法則)하에 있습니다. 전생의 것이 지금 내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에, 금생에 노력한 만큼의 방정식대로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물론 지금 짓는 것은 내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면 최선을 다해 노력할지언정 욕심은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나한테 못살게 구는 사람, 원수같이 느껴지는 사람, 손해를 끼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엉뚱하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내가 전생에 했었던 것을 갚아주는 것으로 믿어 남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심의 두 가지 측면중의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믿는 것이 불교 신심의 첫째입니다.
그런데 인과응보를 믿음으로 해서 겁이 납니다. 내가 지은대로 내가 받는다면, 물론 전생에 지은 바대로 받고 있겠지만, 지금 내가 짓고 있는 것이 어떻게 되는지 겁이 나요. 행위를 하고, 말을 하고, 뜻을 세우는 것이 업인데, 이런 것이 원인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온다고 생각하니까 겁나는 것입니다.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행위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절망(絶望)하게 됩니다.
절망했을 때, 다시 소생을 해야 합니다.
지금 짓고 있는 것으로만 봐서는 지옥이 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님생명 쪽에서 나에게 끊임없이 작동되어 오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괴로움의 세계에 있지 않고, 부처님생명인 절대무한생명 속으로 돌아오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절대무한 속에는 인과응보라는 것이 남아 있을 여지가 없습니다.
나의 참생명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촉구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작용되어 오고 있는데, 그것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입니다. 아미타(阿彌陀)가 나의 참생명입니다.
그러한 아미타의 세계에 가려면 ‘나무(南無)’를 해야 합니다.
‘나무’란 “인과응보 속에 살고 있는 이 가짜 생명을 버리고 진실생명인 부처님생명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돌아가려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겠습니다.” 하는 것 역시 ‘나무’입니다. 그래서 ‘나무(南無)’할 때 우리는 중생생명(衆生生命), 인과응보의 세계를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과응보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상대유한의 세계 속에 있는 것이고, 나의 참생명인 절대무한의 세계 속에는 인과응보가 없습니다.
불교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생사해탈은 ‘나무아미타불’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가지 신심 중에 하나입니다.
이처럼 불교의 두 가지 신심으로 하나는 인과응보를 믿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처님의 대비원력에 의해서 나는 반드시 부처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는 ‘나무아미타불’에 의해서 부처된다.”는 신심이 없으면 절망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절망은 반드시 나무아미타불에 의해서 나의 참생명을 일깨우게 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회주한탑스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옛날 분들은 ‘이종신심(二種信心)’이라고 해서, 두 가지의 믿는 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불교 신심의 첫째 측면은 ‘우리가 살고 있는 경험, 내지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질문에 바탕을 둔 믿음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불교에서는 인과응보(因果應報), 혹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을 이야기합니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를 업(業)이라고 합니다.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 말로 짓는 구업(口業), 또 마음속으로 생각을 일으키는 의업(意業)을 통틀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삼업으로 짓는 것이 모두 내게로 되돌아온다고 해서 자업자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착한 일을 하면 착한 일을 한 것에 대한 보답이 되돌아오는 것이고, 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그에 따른 재앙이 되돌아오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자업자득, 인과응보[원인과 결과가 相應한다]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착한 일을 많이 하더니 아주 잘살고, 또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나쁜 일만 많이 하더니 나중에 좋지 않게 되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어떤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또 어떤 사람은 복이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는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불교에서는 이에 대한 설명으로써 ‘인생을 단막극(單幕劇)으로 보지 말라’고 합니다.
인생은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이미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의 전(前) 생애를 전생(前生)이라고 하고, 후일에 나올 생애를 후생(後生)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전생이 있어서 전생 동안에 착한 일을 했으면 복을 받는 금생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고,
전생에 나쁜 일을 많이 했으면 금생에 복을 받지 못하는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과경(因果經)을 보면, ‘전생의 일이 궁금하면, 금생(今生)에 네가 받는 것을 보아라.
현재 경험하고 있는 운명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 전생에 네가 지은 것이다.
내생(來生)이 궁금한가? 금생에 네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생에 네가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현대인들은 대체로 전생이 있다는 말조차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들이 서로 다른 운명을 살고 있다는 자체가 전생에 각각 다른 업을 지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인데도, 과학적(科學的)으로 전생을 증명(證明)해 주기를 원합니다. 다행스럽게도 현대과학, 특히 심리학(心理學)에서는 대개 3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생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린애들이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생을 기억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사실여부를 알아보는 것으로 처음 이루어진 것은 1940년대 후반에 인도의 ‘샨티데비’라는 아이에 의해서입니다. 샨티데비의 이야기가 인도정부의 조사를 거쳐 신빙성 있는 사실로 공표되자, 미국의 이안 스티븐슨(Ian Stevenson)박사가 생각하기를, 샨티데비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20여 년간의 조사 끝에 누가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20여명의 전생담을 발표, 이 내용을 버지니아 대학교 출판국에서 책으로 발간했습니다. 이것을 ‘전생 기억자의 기억내용 확인’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투시(透視)의 방법입니다. 편지봉투에 편지를 넣으면 보통사람들은 편지내용을 알 수 없지만, 투시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편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초능력은 ESP라고 해서 제6감(第六感), 즉 우리의 감각능력인 5감(五感)을 넘어선 감지능력 중에 한 능력입니다.
이 방법으로 전생을 보게 된 것은 ‘에드가 케이시’ 라는 금세기 최고의 초능력자에 의해서입니다. 이 사람의 원래 직업은 사진사였는데, 어느 날 우연히 손님으로 온 사람의 몸을 투시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의 병과 병이 오게 된 원인을 밝혀주었는데, 나중에 점차로 병의 원인이 금생(今生)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생과 금생의 인과관계를 밝히게 된 것입니다. 이 몸에 나타나는 현상도, 주위의 사람들도,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는 것도, 운명 전체 모두가 에드가 케이시에 의해서, 전생의 것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심리적인 기법(技法)을 통해서 전생을 밝히는 최면의 방법입니다. 이 중에는 연령역행(年齡逆行), 혹은 연령퇴행(年齡退行)이라는 것이 있어요. 이것은 일종의 잠재의식을 통해서 하는 것으로 최면을 걸어서 연령을 뒤로 돌리는 것입니다.
미국의 푸에볼로시 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 ‘버언스타인’이라는 실업가는 “투시에 의해서만 전생을 밝혀낼 것이 아니라, 연령역행의 방법을 통해서도 전생을 밝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중년부인을 대상으로 해서 최면을 한 결과 그 부인의 전생을 밝혀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부인의 전생담이 ‘브라이디머피를 찾아서’라는 책으로 1956년에 초판 되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전생을 밝히는 방법으로 나타난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결국 전생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무한(無限)한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앞으로의 미래도 무한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참생명은 무한생명이라는 것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무한생명이 나타나는 방식은 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반복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를 윤회(輪廻)라고 합니다. 인생은 단막극이 아니라, 무한한 장편소설입니다. 각 장마다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공통된 줄거리로 이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1장에서 있었던 일이 제2장으로 이어지고, 제2장에서 있었던 일이 제3장으로 이어지는 인과응보의 과정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내가 지은 것은 내게 돌아오고, 내가 짓지 않은 것은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절대법칙(絶對法則)하에 있습니다. 전생의 것이 지금 내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에, 금생에 노력한 만큼의 방정식대로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물론 지금 짓는 것은 내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면 최선을 다해 노력할지언정 욕심은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나한테 못살게 구는 사람, 원수같이 느껴지는 사람, 손해를 끼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엉뚱하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내가 전생에 했었던 것을 갚아주는 것으로 믿어 남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심의 두 가지 측면중의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믿는 것이 불교 신심의 첫째입니다.
그런데 인과응보를 믿음으로 해서 겁이 납니다. 내가 지은대로 내가 받는다면, 물론 전생에 지은 바대로 받고 있겠지만, 지금 내가 짓고 있는 것이 어떻게 되는지 겁이 나요. 행위를 하고, 말을 하고, 뜻을 세우는 것이 업인데, 이런 것이 원인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온다고 생각하니까 겁나는 것입니다.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행위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절망(絶望)하게 됩니다.
절망했을 때, 다시 소생을 해야 합니다.
지금 짓고 있는 것으로만 봐서는 지옥이 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님생명 쪽에서 나에게 끊임없이 작동되어 오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괴로움의 세계에 있지 않고, 부처님생명인 절대무한생명 속으로 돌아오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절대무한 속에는 인과응보라는 것이 남아 있을 여지가 없습니다.
나의 참생명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촉구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작용되어 오고 있는데, 그것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입니다. 아미타(阿彌陀)가 나의 참생명입니다.
그러한 아미타의 세계에 가려면 ‘나무(南無)’를 해야 합니다.
‘나무’란 “인과응보 속에 살고 있는 이 가짜 생명을 버리고 진실생명인 부처님생명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돌아가려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겠습니다.” 하는 것 역시 ‘나무’입니다. 그래서 ‘나무(南無)’할 때 우리는 중생생명(衆生生命), 인과응보의 세계를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과응보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상대유한의 세계 속에 있는 것이고, 나의 참생명인 절대무한의 세계 속에는 인과응보가 없습니다.
불교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생사해탈은 ‘나무아미타불’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가지 신심 중에 하나입니다.
이처럼 불교의 두 가지 신심으로 하나는 인과응보를 믿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처님의 대비원력에 의해서 나는 반드시 부처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는 ‘나무아미타불’에 의해서 부처된다.”는 신심이 없으면 절망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절망은 반드시 나무아미타불에 의해서 나의 참생명을 일깨우게 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회주한탑스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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