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如 김태영 문사수법회 대표법사
여여법사님의 법문은 일상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한, 쉽고도 명확한 법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법문을 통해 생명의 실상을 깨닫고, 진리로 피어나는 삶의 희열을 느껴보자.
‘힐링’을 원하는 ‘나’점검 우선
언제부터인지 사회 경제 정치 문화 전반에 걸쳐 ‘힐링(Healing)’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힐링 과잉을 넘어서 대한민국이 온통 힐링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입니다. 그래서인지 불교계에서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힐링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불교가 마치 힐링의 한 분야인 것 같은 인식마저 심어주는데, 이에 대해 분명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힐링 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행복하고 보람있게 살고자 무척이나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복과 보람을 얻기 위해 나름대로 애써도 쉽게 얻어지지 않고, 이 과정에서 지치고 피로해진 심신을 달래고자 힐링에 대한 관심과 욕구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 힐링 받고자 하는 욕구가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힐링을 찾기에 앞서 먼저 살펴야 할 것은, 힐링 받고 싶어하는 ‘나’ 자신에 대한 점검입니다. 이러한 점검이 없다면 범람하는 힐링의 홍수에 휩쓸려서 오히려 힐링 자체에 의한 피로까지 감당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추구하고 힐링 받기를 원하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스스로에 대한 나름의 진단과 처방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일매일이 참 힘들고 피곤하다’ ‘세상 사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까?’ 이러한 자기 진단은 자연스럽게 타인과의 비교를 불러와,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나처럼 힘들까? 유독 나는 더 힘들게 사는 거 같아…’라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피곤하고 힘들다는 자기 진단이 서로간의 끝없는 비교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급기야는 모두가 힘들다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닥치는 날마다 쫓기는 날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다가옵니다. 당연히 살맛이 나지 않습니다. 살기는 살되 끝없는 불안의 연속이니, 너 나 할 것 없이 힐링이라는 이름의 처방을 찾아 나서는 대열에 합류하게 됩니다.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국내외의 소문난 여행지에도 다녀오고, 정신과 의사나 심리상담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기도 하며, 멘토로 알려진 전문가의 강연을 통해 해결책을 구하기도 합니다.
힐링 아닌 해탈이 진정한 행복
해탈하려면 스스로 속박되어 있음 알아야
해탈은 수행의 종착점 아닌 삶의 출발점
그런데 여행을 가서 마음에 평안을 느끼고 왔다 하더라도, 일상에 복귀한 후에는 이내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힘들고 피곤했던 상황 자체가 여행을 다녀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멘토라는 분이 제시한 해결책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내 삶에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도 검증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힐링으로 제시되는 처방들의 효험에 대해서 제대로 검증된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매스컴에 많이 등장하고 한창 유행되고 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사람들을 힐링으로 몰아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결국 우리에게 피곤함을 더 가중시키는 꼴이 되고 맙니다.
자기 식의 목표 하에
스스로 쫓기는 삶이 속박
누구나 각자의 인생에서 짊어지고 가야할 자기 몫의 짐이 있습니다. 학생에게는 공부의 짐, 직장인에게는 업무의 짐이 있습니다. 가장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고, 장성한 자식은 연로하신 부모님을 봉양해야 됩니다. 이 짐의 무게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든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기에게 이렇게 무거운 삶의 짐을 지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무능한 남편을 만나서 한평생 고생했다는 아주머니,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출세하기 어렵다는 젊은이, 악덕 사장을 만나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는 직장인 등등... 들어보면 애타고 절절한 사연을 품은 채 오늘도 자기 삶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고 있는 우리 주위의 부모, 형제, 친구, 동료들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따지고 보면, 내가 짊어지고 있는 인생의 짐을 나에게 짊어지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짊어지고 있는 ‘나’ 자신의 선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왜 무거운 짐을 짊어진 힘든 삶을 선택한 것일까요?
한마디로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어보면 많은 아이들이 아빠, 엄마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아이가 볼 때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좋은 사람은 아빠, 엄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빠가 세상에서 최고인 줄 알았던 아이의 눈에 점차 아빠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님이 더 위대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는 사장님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사장님보다 회장님이 더 높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회장님이 되겠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가장 높으니까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꾸는 아이도 있습니다.
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꿈을 갖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든 ‘더 나은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에 얽매인 나머지, 항상 목표달성을 위해 쫓기는 삶을 살게 된다면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겉으로는 목표지향적이고 성공에 다가가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스스로가 쫓기는 삶을 사는 한 결코 행복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힐링은 힘든 현실 잊게할 뿐
괴로움을 근원적으로 해결 못해
남은 괴로움으로 악순환 되풀이
이처럼 ‘자기 식’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 자청해서 쫓기는 삶을 살아가는 상태야말로 속박(束縛)에 다름 아닙니다. 흔히 속박이라 하면, 정치적인 의미로 개인의 자유를 외부에서 강제로 억압하는 것을 생각하기 쉬운데, 불교에서 말하는 속박은 스스로에 대한 속박입니다. 자기 입장에서 진실이라는 한정된 테두리를 긋고, 스스로 그 속에 들어가서 갇힌 삶을 사는 것이 속박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속박되어 있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풀어줄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를 속박했기 때문에 오직 스스로만이 속박을 풀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해탈(解脫)입니다. 해탈은 말 그대로 ‘풀어서[解] 벗어남[脫]’이기에, 해탈하려면 먼저 ‘나’ 자신이 스스로 속박되어 있다는 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간혹 힐링을 통해서 속박이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번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 마을이나 인적이 드문 오지를 여행하니까 마음이 고요해졌다던가, 누가 자기에게 “그동안 고생했지?”라고 위로해주는 말에 울컥하고 눈물이 났는데 그로 인해 마음에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다던가… 이러한 경우에 마음에 위안을 느끼고 정화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처럼 힐링을 체험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마음에 위안을 느낄 뿐, 이내 또 다른 속박이 계속될 따름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힐링을 넘어서 스스로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이어야 합니다.
힐링은 괴롭고 힘든 현실을 일시적으로 잊게 할 뿐, 괴로움을 근원적으로 해결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괴로움으로 인하여 계속 힐링을 찾아 헤매게 되고, 결국 악순환만 되풀이 하게 만듭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괴롭고 힘든 나머지 힐링을 찾고자 한다면, 그 전에 먼저 힐링을 찾는 ‘나’ 자신부터 마주해야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 생명의 본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생명의 본래 모습인 자유를 회복하는 것, 이것이 해탈입니다. 그러므로 해탈은 삶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나의 참된 생명가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진짜 나답게 살아가는 삶의 지향인 것입니다.
문사수법회 …www.munsasu.org
문사수법회는 경전을 신앙하고 법회를 받들어 봉행합니다. 문사수(聞思修), 즉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스스로를 비추어 보아, 자기 삶을 수정함으로써 정토에 이르는 지혜의 길을 지향합니다.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30분, 대중법회가 각 지역 전법원에서 봉행되고 있고, 전문 경전공부 기관인 경전학당을 개설하고 있습니다. 문의)031-966-3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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