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론가 정처없이 떠나보고 싶은 계절입니다. 여러 법우님들 계시는 처처(處處)가 다 아름다우리라 생각됩니다만, 정말이지 요즘 이곳 해질 무렵의 호수공원, 하늘, 바람, 거리의 모습들은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 법우님들!
문사수법회 고양법당의 신참 법우 진원명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4시에 잠에서 깨었습니다.
조용히 앉아서 부처님의 거룩하고 자애로우신 상호를 떠올리며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감사기도 드리고 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어제의 나를 점검하고 새날의 나를 예비하는 이 순간 형용할 수 없는 충만감으로 잠이 올 것 같지 않습니다.
너무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혹 법우님 중에는 제가 특별한 감성의 소유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실 겁니다. 물론 저는 다소 감상적인 성품이 있긴 합니다만, 요즘의 저에게는 그럴만한 다분한 이유가 있답니다.
제가 그토록 원했던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냐고요?
예정된 둘째아들과의 단둘이 떠나는 경주여행도 그렇지만 평소 ‘바쁘다 바쁘다’만 연발하는 큰아들이 가끔 가까운 절 일요법회도 참석하고, 마음의 안정을 요할 때는 108배도 할 정도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저의 둘째아들 태형이가 저와 같이 여여법사님의 금강경 법문을 듣고자 일주일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법당에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긴다리를 구부리며 납죽 엎드려 오체투지(五體投地)도 할 줄 알고, 눈에 익숙한 법우님을 뵈면 합장하며 웃을 때, 같이 공양하며 즐거워할 때, 법사님의 금강경 법문을 경청하며 감응할 때, 아들의 해 맑은 얼굴을 슬쩍 슬쩍 훔쳐보며 법문 듣는 제 기쁨은 오로지 감격 그 단어 자체입니다.
그동안 마음 여린 둘째 아들을 불교에 접목시키려고 무진장 노력한 결과입니다. 오늘의 기쁨이 있기까지 저와 아들의 지난 5년간의 세월을 조금은 말씀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지금 이 순간 혹 저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번민하고 계실지도 모를 법우님께 다소나마 위안이 되고 용기를 드릴 것 같아서입니다.
그러니까, 그때가 96년 1월초, 그 소식을 들은 것은 시가 쪽 가까운 친지들을 초대해 즐거운 모임을 갖고 헤어진 직후였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TV와 지면을 장식하는 교통사고 뉴스, 한사람의 생명 그 자체는 본인은 물론 가까운 고리로 연결된 직계가족에게는 더할 수 없이 소중할진대… 바로 자신 앞에 닥치지 않으면 대개가 무덤덤하게 흘려 보냅니다.
물론 그동안은 저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시어머님의 교통사고 소식을 접한 순간은 앞이 캄캄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뇌와 다른 장기엔 이상이 없었고 다만 왼쪽 다리를 많이 다쳐서 약 1년 정도의 장기적인 치료를 요한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격주로 지방병원에 - 시어머님이 그곳을 고집하셨기 때문 - 내려가 시어머님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같이 나누랴, 서울 살림하랴… 아들에게 눈길 줄 겨를도 없이 지냈습니다.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그후 저에겐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더 큰 문제가 서서히 그림자처럼 다가왔습니다.
저에게는 성품이 정반대인 아들만 둘이 있습니다.
그 당시 큰아들은 대학3년 재학 중 휴학하고 입대 중이었고, 둘째 아들은 자신이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하고 전혀 원하지 않던 대학을 1년쯤 다니고 휴학 중이었는데 재수를 해보겠다고 해서 저랑 의견을 절충하던 때였습니다.
저는 학교를 다니며 방과후의 시간에 준비를 해보든지 아니면 재수학원에 다니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는데, 집안 형편이 어수선하게 되자 아들의 성격상 적응하기 힘들거라 여겨지는 스파르타식 숙식학원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의 발단일 줄이야!
직접 가보니 체질도 약하고 입맛도 까다롭고 성품도 여린 아들이 견뎌내기엔 너무나 힘든 환경과 교육시스템이었지만, 집안사정이 그러하니 어쩌겠습니까? 본인이 저토록 원하니 군대 간 셈치자며 마음을 다잡고 그곳에 보냈습니다.
그후 아들은 아니나 다를까 겨우 2개월을 견디고 - 주말에 집에 오면 늘 말이 없고 극도로 불안한 모습이었습니다 - 5월초 어느 주말.
집에 왔다가 학원 간다고 나간 아이가 1시간 후 초인종 소리에 나가보니 하얗게 바랜 얼굴로 멍하니 현관밖에 서있었습니다.
“태형아! 왜...? 다시 왔어?”
“그냥.....”
“그래, 잘 생각했다. 그까짓 대학이 문제냐? 건강이 최고지. 힘들지. 어서 들어와!”
전 정말로 아들이 하루빨리 그 학원 생활을 포기해주기를 내심 간절히 바랬던 터라 - 제 직감으로 그곳에 오래 있으면 아들에게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기에 -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엄마랑 천천히 진로를 생각해 보자고 달랬습니다. 그때는 본인의 고통밖에는 모르시는 시어머님께 아무 말씀도 드릴 수 없어 남편과 아들만 두고 여전히 지방병원에 왔다갔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저나 남편은 몸도 마음도 상당히 지쳐있던 터라 태형이에게 특별한 정신적 배려를 할 기력도 없었습니다. 워낙 천성이 여린 아들은 한없이 의기소침하여 말을 잃더니 급기야는 엄마인 내게 하는 최소한의 몇마디 외에는 서서히 말문을 닫았습니다.
20여 일을 두문불출. 현관 밖에서 사람소리가 나면 조그만 구멍으로 바깥을 내다보는 것, 배고플 때 식탁에 나오는 것 말고는 제 방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TV도 보지 않았고, 극도로 소리를 듣기 싫어했고, 표정은 무표정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병원에 가있을 때는 시어머님 짜증 받아드리랴… 서울에 있을 때는 태형이 눈치보랴… 숨을 죽이고 살며, 혼자 꺼이꺼이 외롭게 울었습니다. 울고 나면 용기가 생겼으니까요. 그러던 중 제가 쓰러지면 안된다는 생각에 무엇인가 나를 붙들 수 있는 게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찌는 듯한 삼복더위였지만 참회하는 의미에서 아빠 몫까지 하루에 108배x2 = 216배씩 백일 발원하고 정진했습니다. 부처님께 의지하며 말입니다. 90년초 초발심한 후 조그맣게 싹터오던 불심(佛心) 한자락이 크나큰 버팀목이었습니다.
무엇이? 누가? 그토록 태형이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원했던 대학에 대한 좌절감? 아빠? 친구? 형? 아니면 엄마인 나에게? 외로움일까…? 알 수 없었습니다.
그후 상당한 세월이 흐른 후 태형이가 나에게 마음을 활짝 연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남보다 모든 면에 부족하고 약하다는 생각이 그애의 내면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그 생각의 지배하에서 꼼짝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과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한없이 나약한 모습으로 움츠리고 있다가도 갑자기 상처입은 호랑이처럼 벌떡 일어나 중얼거립니다.
“엄마! 중학교 때까진 나도 공부 잘했잖아? 그렇지? 엄마? 나도 뭐든지 다 잘 했단 말이야!!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돼? 에이씨∼ 정말! 왜 나를 무시해! 사람들이 날 무시하고 깔본단 말이야! 내가 약하게 생겼으니 우습게 알겠지!”
그때 아들은 늘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하며 몸집이 남자답고 거칠게 보이는 사람들을 막연히 경계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감정풀이의 유일무이한 대상인 이 엄마를 향해 절규할 때면…
“태형아! 누가 감히 너를 무시한단 말이냐? 네가 어때서? 대학은 가면 좋지만 안가도 좋은 거야. 대학 안 나와도 얼마든지 즐겁게 잘 살 수 있어. 키도 크겠다, 얼굴도 괜찮겠다. 마음도 착하겠다. 엄마도 밀어 줄꺼고, 아빠도 형도 다 든든한데 뭘 걱정하니?”
입이 아프도록 위로와 지지를 해주는 것 외에는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내자신의 한계에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나 형체가 잡히지 않는 이 ‘마음’이란 놈이 얼마나 힘이 센 상대인지 법우님들도 다 아실 것입니다. 그때는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데는 화학약품은 약이 안됨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그로부터 서서히 안정을 찾더니 수영도 하고 학원도 다니고 저랑 모든 걸 상의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그해 9월 형이 제대해서 집에 오니 태형이도 힘을 얻고 저도 적적하지 않아 도움이 되었으나, 자아성취욕이 강한 큰아들은 모든 면에 또 그만큼의 노력을 해야만 했기에 복학 시기까지의 공백기간 동안 미국 어학연수를 원했습니다.
저 또한 그 필요를 느꼈기에 셋이서 2박3일의 여행을 갔다온 후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또다시 외로움과 정적이 밀려왔습니다. 그때 태형이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mind control과 다각적인 프로그램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우애를 다지는 곳에 다니고 있었기에 아침에 나가 저녁에 오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다들 따뜻한 사람들이라 그곳에서부터 서서히 타인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사회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집 근처에 새로 생긴 기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 기원의 젊은 원장님이 제 살붙이처럼 어찌나 태형이를 사랑으로 배려해 주시던지, 그분이 바로 96년 후 태형이가 마음을 활짝 연 최초의 타인입니다.
그때부터 태형이가 사람들을 좋아하고 명랑해졌으며 집에 오면 기원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하곤 했습니다. 손님들과 대국해주느라 원장님이 늦게까지 계시면 밤12시까지도 그곳에 있고 싶어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당시 그분은 환경 또한 좋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티도 내지 않은 채 우리 태형이에게 긴 세월 한결같이 배려해 주셨던 것입니다. 제게나 태형이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분입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다니요… 지금 생각해보면 바로 그분이 부처님이지 싶습니다.
그후 태형이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스스로 무엇인가 하고싶어 했습니다. 엄마가 도와주면 도서대여점을 하고 싶다고 해서, 집 부근에 아담하고 예쁜 도서대여점을 차렸습니다. 태형이에게 책임감과 성취감을 주려고 일부러 사업자등록증을 태형이 이름으로 내서 직접 보여주며 격려했습니다.
3개월 동안 낮12시에 문열고 밤12시까지 열심히 했는데, 아무래도 힘들었던지 또 예민해지며 우울한 표정으로 가게에 앉아있으니, 태형이 좋자고 한 사업인데, 손님맞이하랴 태형이 기분 맞추랴 제가 힘들어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태형이는 다시 기원에 다니기로 하고 가게를 정리하였습니다.
일산에 이사온 후, 한겨울이라 집에만 있으니 태형이가 무료해 하는 것 같아 제가 속해있는 자원봉사 단체의 송년모임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의 창립기 선배이신 박선생님이 여여법사님과 태형이를 만나게 해줬으면 좋겠다면서 법사님 핸드폰과 법당 전화번호를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저와 태형이가 문사수법회와 인연을 맺게된 결정적인 동기입니다. 인연이란 기가 막히도록 묘한 겁니다. 특히나 우리 태형이에게는 아까 말씀드린 기원의 원장님 같은 분과의 인연 또한 유별스럽습니다.
이제 드디어 태형이랑 그토록 오고 싶었던 곳에 당도한 느낌입니다. 저희들을 늘 따스히 맞아주시며 좋은 법문으로 위로해주시는 여여, 정신 법사님을 비롯해서 짜증스런 모습 한번 보이지 않고 늘 씩씩하게 움직이는 정성법우님, 조용하고 여성스럽고 자애로운 보명법우님, 문사수 고양법당의 여러 따뜻한 법우님들께 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저의 사랑하는 아들이자 법우이며 같은 도량의 도반인 우리 태형이와 함께 굳세게 이 길을 가겠습니다. 앞으로 제 남은 삶의 여정에서 또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이제는 자신 있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부처님 법당에 살고자 노력하겠습니다.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진원명법우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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