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식사하시러 오세요’하는 목소리가 전화를 통해서 들립니다. 음식점 광고가 아니구요, 때마다 법당 식구들을 챙기는, 고양시 행신동 무원마을 근처에서 식당을 하시는 박귀현 법우님의 목소립니다. 그렇게 가끔 찾아뵙는 박법우님을 법우지를 통해서라도 법우님들께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욕심은 아닐 겁니다.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린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것이 새롭게 보이는 날, 그 반가운 비와 함께 박귀현 법우님의 음식점 ‘한강’을 찾습니다.
법우님과 나누는 한마디 한마디가 법담이고 어느것 하나 귀하지 않은 말씀이 없지만, 여기에서는 그 모두를 전해드리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움으로 남습니다.
처음에 신앙을 접할 때에는
우선 현상계에 보이는 풍요로움을 구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신앙활동을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풍요롭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종교에 귀의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네 인생을 부처님 생애처럼 살아라’고 하면, 과연 정진할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하는 의문도 가져봅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처음 부처님법을 만나서 정진을 시작할 때는, 아이들이 반듯하게 자라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스스로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법문을 듣고, 법우지를 통해서 많은 법우님들의 말씀을 듣고 정진을 하다보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차츰차츰 깨닫게 되었지요.
현상계가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눈이 달라져서 풍요로운 것이죠. 그러니 더욱 정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죠.
하루 중에
순서대로 정진한다고 하면 4∼50분 걸립니다. 그런데 이 시간을 유용하게 쓰지 못할 때가 많아요. 이 시간을 내가 안 쓴다고 해서 남한테 빌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아까운 줄을 모르고 그냥 흘려보냅니다. 이 시간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굉장히 크겠지요. 하지만 그런 생각도 없이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이 하루 24시간 중에서 20시간은 될 것 같아요. 그러면서 뭐가 안 된다고 불평합니다. 제가 그나마 ‘이런 점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스스로 인지할 수 있게 되어서 부처님 법 만난 것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제 큰 아들의 이름이 경우인데
그 아이가 고3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위해서도, 불안한 저를 위해서도 매일 같은 시간을 정해놓고 정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며칠을 잘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백일을 한결같이 정진한다는 것은 엄두가 안나요. 하루도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렇게 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주 가끔은 누가 대신해줄 수 없을까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요, 그 유혹은 대단합니다.
이렇게 알면서도 실천에 못 옮기는 것은 큰 죄겠죠. 모르고 사는 것이야 몰라서 시정을 못하는 것이니까 큰 죄는 아닐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알면서도 게을러서 못하는 경우가 때때로 있습니다. 전에는 아이한테 ‘네가 학생으로서 해야할 일은 공부인데 왜 하지 않느냐?’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일생을 살면서 할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저 또한 할 일을 제대로 안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그런 모습을 보고 나니까 이젠 아이에게 그렇게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지금은 아이에게
조금은 다른 말을 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은혜로움 속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본인이 받아온 이 은혜를 갚기 위해서는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지요. 남을 돕고 싶어도 마음 뿐으로 당장 남한테 피해를 주는 입장이 되면 안되잖아요. 각자 위치마다 할 일이 있으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해서 안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노력하는 아이를 못한다고 꾸중하면 안되겠지요. 안하고 게으름 피울 때, 인생을 먼저 산 입장에서 일러주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율적으로 생활해나가면 누가 간섭을 하겠어요. 자율이 안되면 타율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하지 못하는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일까요? 억지로라도 끌어 당기려고 하는 것이 부모마음이 아닐까요?
그런데 사랑한다는 방패속에서
아이를 꾸중할 때는 정말로 이성적으로 꾸중해야 하는데, 감정이 들어가서 내 감정에 의해서 꾸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이와 의견충돌이 있을 때도 이성적인 마음을 유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것 같지만 지켜보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하지요. 아이가 늘 애기같아서 염려스러워 하는데, 문제가 생겨서 같이 이야기를 하다보면, 굉장히 논리적으로 말을 잘하고 또 제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제 잘못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법회에서는 자식으로 온 부처님이라고 하지요. 정말 그래요. 아이한테 배우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부처님법을 배우다 보니 예전 같으면 당연하다고 생각할 일들을 아이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지겠죠. 그래서인지 아이한테 깜짝 놀랄 말을 들었습니다. 어느날 아이가 “엄마, 나는 감사해요.”라고 말하더라구요.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아이한테서 감사하다는 얘기가 어디서 나올까? 저도 감사합니다.
조금 다른 얘긴데
우리 집에 고양이가 한 마리 옵니다. 저는 동물을 싫어하는데, 남편은 참 좋아해요. 키우는 것은 부담스럽지만 밥 한두 번 주는 것은 할 수 있어요. 남은 음식에 고기가 많으니 그것을 모아서 주면 얼마나 맛있겠어요. 그러니 가끔 우리집에 오면 자기도 편안하게 생각하는지 음식도 먹고 잠도 자고 그럽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고양이가 남편의 손을 할퀴어서 상처가 생기게 되자, 남편이 많이 혼냈습니다. 그랬더니 그 뒤로는 절대로 우리 집에는 안오는 거예요.
우리는 열심히 정진을 하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편안함의 유혹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잖아요. 정진이 힘드니까 하기 싫고, 우선의 달콤함에 죽을 줄 알면서도 가잖아요. 그 고양이는 헤매지 않고 먹을 것이 있는 곳을 알면서도, 가면 위험하다고 느끼고는 절대로 안 오는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렇게 볼 때 저는 사람이 굉장히 영리한 것 같으면서도 바보가 아닌가, 우리가 짐승보다 우월한 것 같지만, 짐승보다도 못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제가 장사를 하니까
당연히 손님이 많으면 좋죠. 그렇지만 그런것에 매달리게 되면 끝이 없어요. 제가 이 가게를 위하고 여기 오는 손님을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것은 제 몫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손님을 최대한 편안하게 모시고 정갈하고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손님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접을 해드리는 것이 저의 자존심입니다. 맛이 있고 없고는 드시는 분의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음식점을 낸다고 하면 기본적인 솜씨는 누구나 있지만, 누가 정갈하게 하느냐에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집 삼계탕이 맛있다고 하시는데, 제가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굉장히 정갈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지만 손님이 오고 안 오고는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열심히 하면 언제가는 인연 닿은 분들이 오겠지요.
저도 예전에는
부처님께서 요만큼 주면 나도 요만큼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부처님 저는 아직 그 단계에 들어가지 못해서 아직 할 수 없습니다’라고 생각했지요.
예를 들어서 어느 정도가 되어야 보시(布施)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수준에 가서 보시한다는 것은 진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 내 여건 속에서 하는 것이 보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저만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없으니까 나한테 어느 정도 주어지면 보시를 하겠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는 쓸 데 없는 돈을 너무 많이 버려요. 정말 필요한 곳에 값지게 쓰는 것은 너무너무 옹색하면서, 큰 돈을 버리면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정심에서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얼마 베푸는 정도로는 아직 아니지요. 적으나 많으나 보시는 내가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감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것도 감사하고, 아이가 건강한 것도 감사합니다. 이제 철이 들었는지 감사하는 마음을 그때그때 표시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입니다. 말로는 감사하다고 말하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감사를 느끼는 만큼 다는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일부분이라도 꼭 감사의 표현을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박귀현법우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벌써 시간은 저녁시간이 됩니다. 식사를 하고 가라는 말씀에 같이 방문한 법우님과 도가니탕 한그릇을 가볍게 비웁니다. 항상 정진하시는 그 모습을 찬탄드렸더니 남들이 뭐라고 해도 부끄럽고, 미안하고, 잘못한 것은 스스로가 더 잘 안다고 하십니다.
취재·정리:문미숙, 박용희 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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