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바니 세바네
 

변화에 대하여

정 희 석 2009.09.16 조회 수 3608 추천 수 0

우리 문사수법회 고양법당이 대중법회로서의 개원 6주년을 맞이했습니다.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價値) 있고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만큼 힘들고 외로운 일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가장 보람있어야 할 사업이 사람들의 무관심과 오해로 인하여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이 전도(顚倒)된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참으로 다같이 고민해 볼만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부처님의 정법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펼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구체적으로 말해서 어떤 사람이 불교(佛敎)가 뭔지, 문사수(聞思修)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모르다가 이제 우리 문사수법회를 만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게 되었다면 그 사람에게 달라지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표현으로 답변이 가능하겠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표현은 바로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그것도 아주 ‘혁명적인 변화’라는 말을 저는 가장 좋아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도서관에서 ‘인격혁명’이라는 책이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꽤 두꺼웠던 책이었고 끝내 그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제목이 저에게 불러일으킨 기대와 호기심은 유난히 컸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 당시 저는 저도 모르게 제 자신에 대하여 불만이 많고, 또 무엇으로인지는 모르지만 변신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춘기라 불리던 그 시절에 말입니다.

 

문사수법회와 인연을 맺은 지 이제 3년이 흘렀습니다. 처음 1년이 경과했을 즈음 저는 정진원[정토사] 수련법회에서 신앙발표를 했습니다. 얼떨결에 했지만 당연히 주제는 문사수와의 만남 속에서 저에게 일어난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서 신앙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법회에 참여하면서, 새벽 경전공부에 참석하면서, 법우지에 간간이 글도 발표하면서 다시 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저는 다시금 그 동안 문사수와의 만남 속에서 ‘저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하여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변화가 과연 있기는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 변화의 정체는 무엇이었는지? 그것은 과연 제가 그렇게 바라는 ‘존재의 혁명적 변환’이였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변화(變化)하였는지의 여부는 제가 판단할 문제는 아닙니다. 주위의 법우님들이 판단해 주실 문제입니다. 나는 이렇게 변화했는데 왜 몰라주느냐고 외치는 꼴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내가 보는 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나는 어떠했는가? 변했는가? 그대로인가? 스스로에게 자문(自問)해 보고자 합니다.

 

『변화(變化) 아닌 변화가 있었다.』 라고 자답(自答)합니다.

 

처음부터 변화할 것이 없었기에 변화라고 말할 수 없지만, 전에는 그것을 모르다가 이제는 알게되었으니 그것은 또 변화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하였지만, - 미숙한 인격의 ‘나’에서 성숙한 인격의 ‘나’로 변화하자! 욕심 많은 ‘나’에서 욕심을 버리고 세상사에 초연한 ‘나’로 변화하자! 등등 - 그러나 끝끝내 변화를 바라고 있는[변화를 욕심 내고 있는] ‘나’는 바로 그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었던 것입니다. 번번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순환 고리 속에 갇혀서 다람쥐 쳇바퀴만 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작심삼일에 스스로 한심해 하기도 하다가 어떤 때는 책을 읽고 감동해서 큰 변화를 경험한 듯 의욕에 넘치기도 했지만, 어느새 종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나를 다시금 확인하는 경험이 반복되었습니다.

 

애초부터 변화는 ‘나’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문사수에서 스님과 법사님들의 법문은 바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항복했을 때 머리는 맑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변화의 가능성에 절망하고 포기한 것은 그 자체가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산은 산이로되 옛 산이 아니오. 물은 물이로되 옛 물이 아니로다.” 라고 한 고인(古人)의 말씀이 비로소 처음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내가 변하니 온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3년 동안 새벽마다 정진하였습니다. 목요일 새벽 경전 공부하는 날과 회사 일로 지방에 출장을 간 경우 등 극히 예외적인 날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정진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정진하면서 항상 잊지 않은 생각은 “정진은 정진이 아니다. 그래야만 비소로 정진이 된다”라는 금강경 논리의 적용이었습니다. 분명히 정진을 열심히 했지만 그 정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이런 면에서 정진은 참으로 공허합니다. 그러나 그 공허함은 바로 ‘내’가 공허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는 원래부터 없었음을 순간순간 끊임없이 일깨워 줍니다. ‘내’가 지워질수록 짜증나던 일상이 하나같이 소중하고 감사한 은혜임을 절실히 알게됩니다. 나에게 닥치는 모든 장애의 실체가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 더 이상의 장애는 있을 수 없게됩니다. “만약 모든 상(相)이 상이 아님을 보면”이라는 금강경의 게송이 명확하게 이해되는 듯 했습니다.

 

저는 이 『변화 아닌 변화』를 소중히 하려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문사수법회에 감사합니다. ‘나’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깜박 깜박 잊기 일쑤고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다시 그 ‘나’는 공허함을, 아무 것도 아님을 봅니다. 그 ‘나’는 나의 참생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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