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法華經)》의 막이 오르기에 앞서서 어이없는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부처님을 모시던 제자들이 온갖 의심의 자락을 접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부처님의 설법을 알아들어야 할 사람들이 스스로 외면하고 맙니다.
어이없는 상황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훗날 이런 소승의 무리들을 가리켜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으로 부른 것을 보면 십분 이해하게 됩니다.
성문(聲聞)이란, 말 그대로 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즉 자신의 지식욕이 채워지면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책을 읽거나, 남의 이야기 듣기를 즐깁니다. 그것만이 성문의 유일한 보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직 눈앞에 보이는 사실에만 의미를 둡니다. 지식을 구하는 노력에 있어서는 참으로 열심입니다. 때문에 그 노력만큼 자신의 지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열망도 강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납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식 또는 경험을 마지막 판단의 근거로 삼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문은 지식을 소유하는가 하면, 지식에게 스스로 소유되고 맙니다.
이에 비해 연각(緣覺)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는 생명감각을 만끽합니다. 자신의 체험을 절대화하고 새로운 체험의 가능성을 아예 인정하지 않습니다. 삶의 다양성을 외면하면서 나 혼자만의 삶을 즐길 뿐입니다.
이처럼 성문과 연각은 자기[我]가 자기를 돌아보고 자신의 노력만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강하게 한다고 생각하기에, 어이없는 일들을 얼마든지 버젓이 합리화합니다. 이러한 성향의 사람은 스스로에게 진실이기를 바라는 사물만 선택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참된 자신에 대한 불감증(不感症)에 걸린 사람들은 생명의 흐름을 스스로 중단합니다. 그것이 지식이든 체험이든, 자신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과의 교류를 당연히 거부하고 마는 것입니다.
성문이나 연각과 같은 소승적인 사람들의 목표는 자신의 학문적인 성취나 혼자만의 깨달음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자연히 관계 짓고 사는 다른 생명에 대한 배려는 항상 뒷전에 두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현상을 모순으로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생명과의 단절을 즐깁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진정 펄떡이는 삶의 모습은 이와 정반대의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동전은 둥근 모양입니다. 그럼 과연 동전의 속성은 항상 둥근 것입니까?
아닙니다. 길목마다 놓여 있는 자판기를 사용할 때, 우리는 동전을 옆으로 누입니다. 자판기의 동전을 받아들이는 입구가 직사각형으로 생겼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승(大乘)입니다.
우리는 원래부터 이렇게 소소한 것부터 삶의 모든 것들을 완전히 성취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생명을 찾는 구도자’ 또는 ‘참생명을 구현함에 뜻을 둔 생명’을 뜻하는 보살(菩薩)의 삶을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이상적인 삶으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보살은 모든 삶의 현상들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것을 배우고 이해함에 있어서 잠시의 쉼도 용납하지 않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참되게 산다는 것을 미리 설정하고, 그것에 억지로 도달하려는 작위적인 태도는 보살의 것이 아닙니다.
보살은 교조주의(敎條主義)적인 성문의 경직성이나 신비주의(神秘主義)를 추구하는 연각의 애매함 모두에 연연치 않습니다. 성문과 연각을 스스로 토한 실로 자신을 묶는 누에와 같다고 한다면, 보살은 자신이 토한 실 위를 자유자재로 노니는 거미와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그래서 보살에게는 나와 너라는 구별이 애당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남이 원래 없기에 세상사 모두가 나의 일입니다. 다른 사람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자아(自我)가 자신에게 없듯이, 세상의 모든 것에도 실체가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보살이 획일적인 한 가지의 모습만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가정에 있거나 직장생활을 하거나 어떤 자리에 있어도 삶의 주인공이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때로는 스승이 됩니다. 때로는 제자가 됩니다.
언제까지라는 한정을 두지도 않습니다. 삶의 과정 자체가 이미 완성임을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보살이 사는 시간을 굳이 문법적으로 설명한다면, 현재진행형(現在進行形)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마침표를 찍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산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미지(未知)의 삶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드러난 모습도 우리의 인생이겠지만, 살아가야 할 생명의 기회는 무한히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 지하(地下)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아무리 첨단의 과학을 동원해도 지진을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화산(火山)의 폭발을 감당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엄연히 활동하고 있는데도 눈치 채지 못할 뿐, 그 움직임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고 그것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처럼 가소로운 소리도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생명의 가능성을 현상적인 기준에서만 평가하는 데 길들여져 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소승적인 삶의 태도는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빙산(氷山)의 일각(一角)’이라는 말이 있듯이, 드러나야 할 우리의 생명내용은 충실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와 같은 무한한 가능성의 실현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닙니다. 바로 법우님의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삶이 지향할 궁극의 길은 생명의 무한성을 시간과 공간마다에서 증명하는 보살의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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