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듣기
 

마음을 따르는 현실

문사수 2019.01.23 조회 수 581 추천 수 0

현실(現實)이 자기를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고 투덜대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가하면 ‘저 사람은 참 현실적이야’ 하면서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현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깊은 산골짜기를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 소리는 대개 종각(鐘閣)에 매달린 범종(梵鐘)에서 나는데, 이때 두드리는 나무를 당목(撞木)이라 하고, 이 당목과 접촉되는 자리를 당좌(撞座)라고 합니다.
그럼 당목으로 당좌를 때릴 때 나는 ‘둥~’ 하는 소리는 어디서 오는가?
종(鐘)에서 나오는 것 같지만 당목과의 부딪힘이 없다면 어림도 없습니다. 또 당목에서 나오는가 싶은데, 나무가 소리를 생산할 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목과 종이 접촉할 때면, 언제나 종소리는 납니다.
이와 같이 종소리는 부딪힐 때마다 날 뿐입니다. 그런데 이를 잡으려 하고, 잡아서는 고정화시키려고 한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른바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의 속성도 알고 보면 이와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현실이란 삶의 수많은 유동적인 측면과 계속 진행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설사 현실이 아무리 우리를 짓누르고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올지라도, 그것은 이미 과거완료(過去完了)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지금의 현실은 이 순간에도 부딪히는 가운데 우리에게서 생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달은 항상 밤하늘에 떠있는데 달이 뜨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사(反射)하느냐 아니냐 하는 차이에서 말미암습니다. 결국 강강수월래(江江水月來)라는 말이 뜻하듯이 유리나 물과 같이 빛을 반사하는 것마다에는 언제나 달이 뜨겠지만, 맨땅에는 아무리해도 달의 모습이 자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상태를 일러 가피(加被)라고 합니다.
더할 가(加)자에 입을 피(被)자로서 빛이 나를 향해서 올 때 나는 받는 사람 입장이 되어 반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너와 내가 서로를 가피할 때, 나와 너라는 구별은 이제 더 이상의 의미도 없습니다. 비추어보아 서로가 다르지 않은 생명임을 확인하는 순간, 다만 하나의 생명력으로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오묘한 힘을 가피력(加被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피를 구하려는 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처님이시어, 가피를 내려주소서”
하고 거지같이 구걸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마치
“달님이여, 제가 당신을 볼 수 있게 하소서”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달이 언제 자기를 보지 말라고 방해한 적이 있었습니까? 부처님이 언제 우리를 향한 자비방편을 버리신 적이 계십니까?
가피의 주체는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육신을 자기로 믿고 사는 중생생명으로서의 자기가 아닙니다. 부처님생명임을 자각하는 자기입니다. 부처님생명이 부처님생명에게 비치니, 그 부처님생명이 부처님생명으로 살아가게 되는 원리(原理)입니다. 이는 스스로를 중생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리 정성을 들여 빈다고 해서 실현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생명들은 이미 그 자체가 부처님생명의 진실상(眞實相)으로 다가오는데, 우리 쪽에서 그렇다 아니다를 논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나를 닦지 않고 저쪽을 아무리 쳐다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바다에는 달이 뜨지만 백사장에 달이 뜨지 않는 것과 같이, 가피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현실이란 객관적으로 내 밖에  있거나 나보다 먼저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받아들여서 인정한 세계입니다. 여기 자신이 인정한 세계에 갇힐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시사하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머무시던 곳에 이상한 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몸뚱이는 하나인데 머리가 둘 달린 새였습니다. 한쪽 머리의 이름은 카루다이고, 다른 쪽 머리의 이름은 우바카루다 입니다. 그런데 이 새의 머리가 둘이다 보니 사고방식도 두 가지입니다.
이들은 몸뚱이 하나에서 공생(共生)하는 처지이므로, 잠을 잘 때 한 쪽이 불침번을 서면 다른 쪽이 잠을 자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어느 날 우바카루다가 잠을 자고 카루다가 눈을 뜨고 경계를 서고 있는데, 그때 머리 위에서 하늘하늘 떨어지는 꽃잎이 있었습니다. 꽃잎의 향이 너무 좋아 먹으려다 말고 우바카루다를 깨워서 같이 먹을까도 생각하였지만, ‘아, 내가 먹으면 우바카루다도 같이 먹은 게 되지’ 하면서 혼자 꽃잎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 우바카루다가 잠에서 깨어 가만히 보니 배속이 그득한 걸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먹은 적이 없는데 배가 그득한 게 이상해서 카루다에게 물었습니다.
“카루다야, 내가 자는 동안에 뭘 먹었지 않았냐?”
“응, 아까 향긋한 꽃잎이 있어서 맛있게 먹었단다.”
“그런데 왜 날 안 깨우고 너 혼자서 먹었냐?”
“내가 먹어도 같은 몸뚱이 아니냐? 너는 자고 있기에 깨우지 않았어.”
그러자 우바까루다가,
“에이, 나쁜 놈! 맛있는 것을 저 혼자만 먹었냐?”
하면서 벌컥 화를 내었습니다. 둘이 다투면서 까루다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우바카루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잔뜩 삐진 다음부터는 오직 이제나 저제나 복수할 순간만을 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바카루다가 불침번을 서게 되었는데, 앉아 있던 나무 위에 꽃잎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꽃잎은 독이 들어있으므로 먹으면 죽는다는 걸 우바카루다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증오심에 사로잡힌 우바카루다는 말 그대로 눈에 뵈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카루다, 이 나쁜 놈, 저만 맛있는 거 먹는 그런 이기적인 놈은 죽어야 돼’ 하는 생각에, 독이  든 꽃잎을 덥석 물어서 꿀꺽 삼켜버렸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카루다가 몸에 이상을 느끼고,
“우바카루다야, 몸이 좀 이상하다. 배속이 거북하고 사지가 움직여지질 않는다. 아까 나 잠잘 때 뭐 먹었니?”
우바카루다가 깔깔 웃으면서,
“이놈아 그거 봐라. 예전에 맛있는 거 너 혼자 먹었지? 이 나쁜 놈아! 이제 너는 죽었다”
고 하였습니다. 
자, 그럼 카루다 혼자 죽었을까요? 당연히 우바카루다와 함께였지요. 어차피 한 몸뚱이를 의지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이 못 되는 걸 보면서 즐거울 때가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쾌락주의자(快樂主義者)들을 짜르바까(charvaka)라고 불렀는데, 즐기는 것이 입에 음식물을 넣고 씹는 것과 같다는데서 유래합니다. 우리가 흔히 남을 흉보거나 욕하는 때 ‘씹는다’는 말을 하는데, 이렇게 막 씹으면 스트레스도 해소되고 기분이 시원한 것 같지만 뒷맛은 역시 씁쓸하기만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가 나를 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증오의 독기(毒氣)가 스스로를 계속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우들은 만약 화가 나거나 누굴 죽이고 싶도록 증오심(憎惡心)이 일어나게 되면, 그 즉시 화장실로 달려가서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쳐다보십시오. 만약 얼굴을 쳐다보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당신의 얼굴이 아닐 것입니다. 눈은 시뻘겋게 충혈 되고, 머리카락은 있는 대로 치솟고, 콧김을 씩씩거리는 게 어쩌면 야차(夜叉)의 얼굴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더운 피와 살을 먹고 산다는 귀신(鬼神)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본신(本身)은 야차와 같은 귀신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마주하고 있는 당신입니다. 그러니 야차가 아닌 부처님생명으로서의 자신을 잊지 않기 때문에, 참는다는 생각 없이 참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너무나 이런 단정(斷定)들에 익숙합니다.
“저 사람은 나와 아무 인연도 없어.”
“저 집안이 어떻게 되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이렇게 말입니다.
문제는 내 귀에 들리고, 내 눈에 보이고 있다는 점이 께름칙합니다. 아예 보이거나 들리지 않으면 그만인데, 그렇지 않기에 우리는 계속적인 관심(關心)을 갖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관심이야말로 나의 참생명이 살아가는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코 남들의 얘기가 아닙니다.
내가 받아들이고 있다면, 이는 나의 엄연한 현실입니다. 때문에 우바카루다와 같이 자기 삶을 한정시키는 사람에게 삶의 가능성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저 기다리는 것이라고는 죽음뿐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현실의 주인공이여!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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